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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15. 2024

좀 더 순진하게 (45)





     퇴근하는 길에 나는 화장실에 들러 꼼꼼하게 화장을 고쳤다. 경수와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다. 경수와는 첫날 이후로 네 번 정도 더 만났는데 그저 저녁을 먹고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가 부쩍 자주 연락을 해 오고 있어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도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경수를 만나러 나갈 때마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헤어질 땐 매번 다음 약속을 기약했고 만남이 늘어갈수록 얘기를 꺼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건 편집장에 대한 곤란함과 경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경수와의 만남이 어느 정도는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즐겁다는 말은 적절치 않은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그 반대였으니까. 

     사실 경수는 희진이나 현기에 비하면 참으로 밋밋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수연이보다도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했다. 경수 스스로도 자기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경수의 특이한 점이었다. 평범한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을 나는 생전 처음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으로 평범하며 평범할 수밖에 없는데도, 우리 세대는 평범함을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평범함을 인정하는 걸 치욕으로 여기도록 내몰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수는 자신의 평범함을 부인하거나, 자책하거나, 고민하거나, 감추거나, 포장하거나, 특화시키거나, 혐오하지 않았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괴상한 역발상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전능한 오기도 없었다. 이것은 겸손이나 성숙과도 다른 문제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무감각이었는데, 자신에 대해 그토록 무감각하다는 건 희귀한 일이었다. 

     그는 나에 대해서도 그 자신만큼이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실은 무척 놀랍게도) 전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균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파란 많은 바다에서 막 돌아온 선원에게는 땅의 단단한 고착이 오히려 흥미진진할 것이다. 희진이나 수연이, 현기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내 발밑 한 치 옆에 깎아지른 절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럴 땐 내 자신마저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뱃속 어딘가가 출렁거리고 머릿속은 딱딱하게 조여 와서 금세 피로해졌다. 사실 세상 그 어느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수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그의 앞에서 나는 그저 58kg이라는 내 몸무게만큼만 건사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1kg도 더하거나 덜지 않았다. 우습게도, 내가 그 이상 무엇이란 말인가. 왜 58이 아무 상관도 관계도 없는 57 59와 함께, 그 끝없는 행렬 속을 계속해서 행진해야 한다는 말인가. 경수는 나에게 마치 지구 반대편 낯선 휴양지에서 누리는 지독하게 평온한 주말 휴가와도 같았다. 

     나는 약속 시간을 약간 넘겨서 종로에 있는 한정식 식당에 도착했다. 커다란 한지 전등이 서까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식당 한가운데에는 실내 정원과 연못이 꾸며져 있어서 알싸한 물이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경수는 미리 와서 주문을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으며 친절했다. 그는 나에게 일본식 유부우동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를 웃게 하려고 형에 대한 소소한 흉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잔씩 마신 뒤, 내가 타고 갈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실내 정원을 구경했다. 바위취, 무늬둥굴레, 프리뮬러, 수국, 별꽃 등등, 그는 식물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민주 씨는 다음 생에는 뭐로 태어나고 싶어요?”

     경수가 연못 속의 금붕어를 향해 손가락으로 물을 튀기다가 불쑥 물었다. 나는 다음 생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글쎄요. 경수 씨는요?”

     “음, 저는 말이죠, 나무로 태어나고 싶어요.”

     마치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수는 쑥스러워했다.

     “나무요? 왜요?”

     “글쎄요. 이유는 그냥, 나무 그대로죠, 뭐.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집도 필요 없고, 다른 사람과 골치 썩을 일도 없고, 투쟁하거나 쟁취할 필요도 없고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서 햇볕을 쬐거나 바람을 받고, 비나 눈을 맞는 거죠. 시간이 아니라 계절이 지나가는 걸 막연히 지켜보면서 사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무가 된 나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눈도, 귀도, 손가락도 없는 존재를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에게 있어서 나무가 과연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무가 바위보다 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타인이 나보다 더 살아있는지조차 우리는 실감하지 못하는데.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물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그냥 말없이 웃어버렸다. 아, 내 이야기의 엑스트라에 불과한 이 사람은 또 어떤 다른 원대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자신의 사진을 보던 중 저 멀리 뒤 배경에서 우연히 찍힌 유명인을 봤을 때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데, 그것은 끔찍한 현기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민주 씨는 어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남자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어요.”

     진심으로 남자가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다. 그래도 내가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남자가 되어 여자와 섹스를 해보고, 또 남자와도 해본다면 말이다. (현기와의 관계 후로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성이라는 건 고작 그 정도의 소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남자라는 건 전혀 다른 것, 빨간색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인 게 아닐까? 나는 남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지구에서 태어나는 셈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과학자들은 남자와 여자의 뇌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인간과 물고기의 차이만큼이나 남녀 간의 차이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같은 인간인 이성에게 보다 다른 종의 동성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지 않나. 그 정도면 우리의 영혼 한 가운데에도 보란듯이 성기가 달려있을 게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영혼의 성기는 육체의 성기보다 더 커서 정작 영혼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에이, 그러면 안 되죠.”

     경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남자가 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민주 씨가 제 여자 친구가 될 수 없잖아요.”

     “네?”

     “농담입니다. 아직 정식으로 고백한 건 아니니까 거절하실 순 없어요.”

     이때야말로 내가 그를 거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니, 이건 무조건 거절해야 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상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묵인하면 앞으로는 정말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고백에 우쭐해져서 평범하고 순진한 여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때 마침 택시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손이라도 잡았을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어쩐 일인지 시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비틀며 천장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람이 맞춰져 있는 시간은 7시 10분이었는데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았다. 새벽이라 더위가 한풀 꺾였기 때문에 나는 밤새 젖혀 놓았던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그리고 1시간이나 더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몸을 웅크린 채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완전히 잠에서 깬 나는 어느새 다시 천장과 시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이 점점 밝아질수록 밤새 전혀 잠이 든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바짝 긴장이 됐다. 왜지? 내가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도 잊고 있는 건가? 아니면 성가신 걱정거리라도 생겼나? 빈틈없이 움직이는 시계의 분침을 머릿속으로 좇으며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 보았지만, 빛바랜 새벽녘 꿈을 떠올리려고 애쓸 때처럼 가렵고 약이 오를 뿐이었다.

     최근 들어 특별히 신변에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요새는 편집장과 부딪히는 일도 없었고 (편집장은 경수와 내가 만나기 시작한 후부터 내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경수에 대해서는 조만간 정리를 하기로 어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단단히 결심을 했고, 희진이나 수연이, 현기와도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다. 현기는 6일 전에 이어 그저께도 다녀갔는데, 매번 방이 덥다고 투덜대는 것만 빼면 그와의 관계도 원만했다. 그럼 그밖에 다른 일은? 얼마 전 값비싼 양가죽 핸드백을 12개월 카드 할부로 사고 나서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소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라 만족하기로 했고, 깜빡 잊고 월세 내는 날을 열흘이나 넘겨서 주인집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일도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최근에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늘어 속이 상했고, 일주일쯤 전에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고모할머니 장례식에 다녀왔고, 그저께 아이스크림을 연달아 두 개 먹다가 설사병에 걸렸던 일까지 꼼꼼히 되짚어보았지만 늘 그렇듯 하나같이 일상적이고 소모적인 일들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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