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Mar 21. 2024

좀 더 순진하게 (46)




     밤새 이불을 덮지 않아서 감기 몸살이라도 걸린 걸까 생각하며 이불을 바짝 끌어당기다가 최근에 있었던 찜찜한 일 한 가지가 문득 떠올랐다. ‘문득’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아주 작은 공 하나가 넓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가상사리에서부터 천천히 원형으로 돌고 돌고 돌아 내려와 결국 구멍을 통해 내 의식 속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두 달째 생리가 없었다. 매달 2일이나 3일쯤에 생리가 있어야 하는데 지난달도 건너뛰었고 이번 달도 벌써 일주일 넘게 날짜가 지나고 있었다. 첫째 달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결에 넘어갔지만 두 달째가 되어서도 날짜를 넘기자 나는 조금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나는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나는 이불을 젖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분히 연극적인 행동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다시 입술을 깨물고 정색을 했다. 하지만 결국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나는 슬쩍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마른 웃음이 아닌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입 주변을 손등으로 훔치며 그럴 리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잠이 덜 깨서 멍한 것뿐이라고, 아니면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열대야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현기의 입버릇처럼 이 방에는 정말로 에어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씻기 위해 욕실로 가서 샤워기를 틀고 잠옷 바지를 벗었다. 그런데 바지를 벗고 나니 윗도리를 벗고, 속옷을 벗고, 물에 몸을 적시고,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한없이 귀찮게 여겨졌다. 매일매일 해오던 샤워였는데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번거로운 행위인 것만 같았다. 나는 바지를 손에 든 채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낮은 지붕 위에 굵은 빗방울이 들이칠 때처럼 갑갑증이 몰려왔다. 문득 언제가 읽었던 현기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침에 눈을 뜨니 11.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리라는 걸

나는 단박에 알았다.

그래서 헛되이 보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샤워는 그만두고 세수와 양치만 한 뒤 욕실을 나왔다. 하지만 갑갑증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아침부터 방 안으로 짙게 드리워진 저 눅눅한 그림자 때문일까. 24시간 볕이 들지 않는 이 좁고 허름한 반지하 방에 새삼스럽게 염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제 나는 괜찮은 방을 구할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는데도 왜 이 방을 떠나지 않고 있는 걸까?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와 블라우스를 껴입고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리고서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매미들이 요란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아, 실은 저게 매미가 아니라 외래종인 쓰르라미라던가. 밤사이 미지근하게 식은 바람이 아직 달구어지지 않은 아스팔트 너머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하고 활기찬 여름 아침이었다. 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맑았고 햇빛은 샤워기의 뜨거운 물처럼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하얗게 밝은 빛이 엑스레이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들어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빈혈이라도 일으킨 것 마냥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전봇대에 기대서서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각할 걱정에 성큼성큼 발을 옮기고 있는 그들은 생각도, 감정도, 복잡한 이야기나 고민거리도 없이, 오직 한 가지 재료로만 빈틈없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안경을 걸치고, 화장을 하고, 구두를 신고, 넥타이를 매고…….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쉰 뒤 그들의 뒤를 따라 전철역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나흘 후,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팬티 속부터 들여다보았다. 혹시 갑자기 시작하게 될까 봐 며칠 전부터 생리대를 차고 있었다. 생리대는 어젯밤에 붙여놓았던 그대로 하얗고 깨끗했다. 정말이지 펄쩍 뛰어올라 천장에 이마라도 들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최소한 그렇지 않다는 걸 똑똑히 확인하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출근하는 길에 약국에 들러 임신 테스트기를 사기로 했다. 평소에 내가 이용하던 약국이 아닌 전철역 근처 번화가에 있는 약국으로 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드링크제를 마시며 잡지를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멀뚱히 서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약사가 안경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나는 턱이 푸르스름한 이 약사가 내 편인지 아니면 적인지 알 수 없다는 헛된 망상 때문에 목이 메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뭐 필요하세요?”

     “네. 저기, 그거 있잖아요. 임신 검사 하는 거요.”

     “아, 임신 테스트기 말입니까?”

     “아, 네, 네.”

     약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선반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용 방법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얼떨결에 모른다고 대답하자 상자를 열고 분홍색 테스트기를 꺼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했다.

     “소변을 여기 이 부분에 묻혀서 말입니다, 한 4분에서 5분 정도 있다가 여기에 선이 두 개 나오면 말이죠, 임신입니다. 선이 한 개만 나오면 임신이 아니고요. 정확성은 90% 이상이고 말이죠. 가끔 불량품이 있으니 두 개를 가져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예, 그러면 두 개 주세요.”

     “만약 임신이라고 나오면 말이죠, 거의 정확하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병원에 가서 다시 확인해보세요.”

     나는 돈을 치르고 재빨리 약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평범한 감기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백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고는 전철을 타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일거리를 꺼내 들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책상 한편에 올려놓은 핸드백에 쏠려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핸드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임신 테스트기가 핸드백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크게 헛기침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몇 번이나 세차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검사는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해볼 참이었다. 회사 공중화장실에서 저걸 사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역하게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결국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핸드백을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제일 안쪽 끝에 있는 칸으로 들어가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그러나 막상 임신 테스트기 상자를 꺼내어 손에 쥐고 나니 돌연 침착해져서 포장 상자부터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간편하게, 빠르게, 정확하게’라는 빨간색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쨌거나 이런 기구가 발명되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의사와 정식으로 맞닥뜨리기 전에 이렇게 사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뭔지 모를 원재료 명칭까지 곧이곧대로 빠짐없이 읽고 난 뒤, 나는 상자를 열고 길쭉한 모양의 분홍색 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테스트기를 손에 들고 머뭇거린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오줌을 누면서 그 밑으로 테스트기를 들이밀었다. 테스트기 뿐만 아니라 쥐고 있던 손에도 온통 소변이 묻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나는 휴지를 둘둘 말아 대충 손에 쥐고서 소변에 흠뻑 젖은 임신 테스트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기다렸지만 테스트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두 개면 임신이고, 한 개면 아니고’를 주문 외우듯 반복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임신이 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조차 잊고서 오로지 검사 결과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테스트기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량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백에서 또 다른 상자를 꺼내려는데, 테스트기 종이 부분에서 푸르스름한 빛깔이 슬며시 떠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한낮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진짜 유령처럼 하얀색 바탕 위를 희미하게 어른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선은 두 개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지로 테스트기를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그대로 바짝 몸을 웅크렸다. 두 손을 꽉 마주 잡고서 깊이 숨을 삼켰다. 하지만 다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가장 처음 느낀 건 구역질이었다. 나는 구토를 하고 싶었다. 우웩 우웩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속에 있는 걸 깡그리 토해내고 싶었다. 누군가 별다른 원한도 없이 그저 재미로 나를 함정에 빠트린 것만 같아 그만 눈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눈물 몇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나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별일 아니야.’

     나는 최대한 깊이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별일 아니야.’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지긋지긋 넌더리가 날 정도로 끝없이 반복되는 신파, 클리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계속)


                             




이전 15화 좀 더 순진하게 (4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