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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29. 2024

좀 더 순진하게 (47)




     그때 여자들이 화장실 안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 명이 내가 있는 칸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나는 겁을 먹은 나머지 문을 다시 두드리는 대신에 “안 돼요, 여기 사람 있어요” 하고 째진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바깥에서 자기들끼리 소리 죽여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들은 각자 빈칸으로 들어가 칸을 사이에 두고 선크림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에 허둥지둥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에 가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오전에 하던 일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한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색 철재 책상들, 짙푸른 가로수 나뭇가지로 뒤덮인 유리창, 12시 47분을 가리키는 갈색의 네모난 구식 시계, 여기저기 무수히 널려 있는 종이 뭉치들, 책상 앞 칸막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여러 색깔의 포스트잇들,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놓은 7월의 달력, 가지각색의 책들이 가득 찬 책장, 누가 돌보는지 알 수 없는 산세베리아 화분 몇 개, 주인 없이 혼자 돌아가고 있는 노란색 탁상용 선풍기, 신문을 읽고 있는 반백의 편집장, 수통에 물이 거의 떨어진 정수기, 꺼져 있거나 혹은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들, 의자 밑에 떨어져있는 파란색 볼펜, 블랙커피가 반쯤 남아 있는 하얀색 종이컵, 변색되고 아랫단이 너덜거리는 진갈색 커튼들, 낮이라 빛이 바랜 형광등 불빛, 활짝 열려 있는 문, 시멘트 바닥에 어른거리는 햇빛, 어김없이 들려오는 매미, 아니 쓰르라미 소리. (세상을 그저 끝없 목록으로 나열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은 확실하고 견고해 보이지만 실은 그저 되는대로 거기에 있는 것뿐이었다. 우리에게 기생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기생하고 있는 이 삼엄한 우연들의 미로. 이 모든 것들을 싹 다 치워버리고 싶어서, 이 사무실을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워버리고 싶어서, 그리고 그 텅 빈 방에 드러누워 늘어지게 한 잠 자고 싶어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에 집에 도착했을 때쯤 나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만큼 피곤했다. 그저 빨리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정말 죽은 듯이 잠이 들고 싶었다. 회사에 있을 때만 해도 집으로 돌아가면 한 번 더 검사를 해봐야지, 다른 회사 제품으로도 해봐야지, 인터넷으로 임신 테스트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지 하고 궁리도 했었지만 막상 집에 들어서자 그 모든 것들이 다 귀찮아졌다. 내일 당장 아이가 나오게 생겼다고 해도 지금은 일단 잠을 자야 했다.

     나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쓰러져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한 번도 깨지 않고 다음 날 새벽 6시가 돼서야 일어났으니 열한 시간을 꼬박 잔 셈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핸드백을 뒤져 여분으로 남아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앉아 테스트기에 오줌을 묻혔다. 그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서 칫솔로 이빨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이빨을 닦았다. 이빨 한 개 한 개를 공들여 구석구석 닦았다. 치약 거품이 많아지면 뱉어내고 계속 닦았다. 입안이 얼얼해질 때쯤 나는 물로 입안을 헹구고 임신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파란색 선 두 개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다. 금세 뜨거운 김이 욕실 안에 가득 찼다. 새벽이라고는 해도 한여름인지라 곧 숨이 막힐 듯 더워졌다. 이마와 가슴에는 어느새 땀이 맺혔다. 나는 옷을 벗고 물줄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지나치게 뜨거웠지만 내버려두었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몸에 부딪혀 허벅지를 타고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는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조금 더 턱을 당겨 내 배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임신 테스트기가 두 번이나 임신이라고 했으니 누군가 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슬쩍 배에 손을 얹어보려다가 꺼림칙해서 그만두었다. 이건 이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 번데기와 비슷한 형태일까? 그도 아니면 다리 네 개에 꼬리가 있는 올챙이처럼 어중간한 모양새일까? 어떤 모습이건 간에 다른 누군가가 버젓이 내 뱃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건 괴상한 일이었다. 임신이라는 게 흔한 일이기에 망정이지 이렇게 괴상망측한 일은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였다. SF 영화에서나, 그것도 SF 공포 영화에서나 벌어질법한 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고 요구하는 멀쩡한 사람 하나가 내 뱃속에서 자신만의 딴 궁리에 몰두하고 있다는 상상을, 좁쌀만 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보고, 주변의 모든 소리를 듣고, 내 심장 박동 수까지 낱낱이 세어가며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오싹한 상상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 며칠을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보냈다.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에는 잠시 잊기도 했다. 하지만 별안간 소스라치기를 반복했다. 특히 먹어도 먹어도 곧 허기가 진다는 사실이 내 증오심을 부추겼다. 아무런 의지, 아무런 판단, 아무런 이야기 없이도 악착같이 작동하는 생명의 권능이 혐오스러웠다.

     편집 일이 몰려 정신없이 바빴던 긴 하루가 끝나고 완전히 녹초가 된 나는 1초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현기였다.

     “여보세요.”

     “어, 나야.”

     “어.”

     “오늘 퇴근 언제야?”

     “글쎄. 일이 많아서 늦게까지 야근할 것 같은데.”

     “몇 시쯤 끝나는데?”

     “10시는 넘어야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안 되겠네.”

     “오늘은 수연이하고 놀아.”

     나는 말해놓고서 아차 싶었다. 말은 바로 하자면 현기가 ‘놀고’ 있는 쪽은 수연이가 아니라 나였다. 하지만 현기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알았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

     현기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집 근처 식당에 들러 순두부백반을 먹었다.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와 취나물이 맛있어서 밥 한 그릇을 더 먹었다. 두 달 전에도 이렇게 밥맛이 좋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순전히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빈둥빈둥 호박빵을 뜯어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선풍기를 최대한 세게 틀어놓았지만 뒷목에는 땀이 맺혔다. 더위에 지쳐서인지 아니면 배가 불러서인지 텔레비전 내용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대로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해보았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떠오르려는 어떤 생각을 물리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회사에서 현기와 통화하고 난 뒤부터였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도 현기의 목소리가 성가신 모기 날개 소리처럼 끊임없이 귓속을 앵앵거렸다. 만약 그 실낱같은 목소리를 만 배로 확대할 수 있다면 스타워즈 다스베이더의 유명한 대사 한 구절쯤이 될 것이다. 바로 내 뱃속의 아이의 아빠가 현기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당연히 아이 아빠는 현기였지만 놀랍게도 나는 처음으로 이 아이를 현기와 연관 지었다.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는데, 내 뱃속의 아이가 내 아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마당이니 말이다. 어쨌건 이 아이는 현기와 나의 아이였다. 이 얼마나 웃긴 말인가. ‘현기와 나의’라니, 대체 현기와 내가 한 아이의 아빠와 엄마가 될 만한 사이던가? 그런데도 이것이 생물학적 인과법칙에서는 참이라는 것이다.

     현기가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정식으로 인식하게 되자 나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삼류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숨겨둔 정부의 임신인데, 내가 바로 그 꼴이 아닌가. 사실 내가 정부라는 사실조차 머릿속에 떠올린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기가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분명 그 자리에서 거꾸러질 만큼 놀랄 것이다. 솔직히 그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다. 다 네 잘못이라며 내게 화를 낼까? 자기 아이가 정말 맞냐고 고약하게 따질까? 비 내리던 그날 밤을 사무치게 후회할까? 아니면, 전쟁 통에서 다리를 잃은 시인처럼 멋진 시 한 편을 써낼까? 수연이의 반응도 짐작해보려 했지만 거기까지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퇴근할 즈음 다시 현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 야근을 핑계 삼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래보았자 하루 이틀이 미루어질 뿐이었다. 지금은 거짓말하는 것조차 귀찮고 힘에 부쳤다.

     “여보세요?”

     “어, 나야.”

     “어.”

     “오늘은 어때?”

     “지금 퇴근하려던 참이야.”

     “그래? 그럼 지금 가도 되지?”

     “지금 바로? 저녁은?”

     “너희 집에서 먹지, 뭐.”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닭갈비 사갈 테니까 그거 먹을래?”

     나는 아침부터 닭갈비가 먹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러든지.”

     그는 말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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