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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21. 2024

좀 더 순진하게 (49)




     현기는 방에 에어컨이 있어야 된다며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선풍기도 충분히 시원하다고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나 역시 목이며 겨드랑이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나는 욕실로 가서 일단 이빨부터 닦았다. 몸에 찬물 두어 바가지를 끼얹고 침대로 돌아와보니 어느새 현기는 잠이 들어 있었다. 옆자리에 누운 나도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 흘렀던 모양이다.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현기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어, 수연아. 아냐, 어, 이제 곧 끝날 거야. 어, 좀 늦었어. 어, 그래? 어. 내가 얘기했잖아. 어, 어, 그렇지. 아니. 어. 알았어. 응. 곧 갈게.”

     현기는 전화를 끊더니 벌컥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안 깨워준 거야.”

     “깨워달라는 얘기도 안 했잖아.”

     “그래도 잠이 들었으면 깨웠어야지. 오늘 여기서 재울 셈이었어?”

     황급히 옷을 주워 입은 현기는 넥타이를 가방 안으로 쑤셔 넣으며 인사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바라보면서 내일은 회사를 쉬고 산부인과에서 제대로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일찌감치 나는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종로에 내려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산부인과에 들어가기로 했다. 딱히 종로여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산부인과 병원이 많기 때문이었고, 또 번화가라 오히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종로에 도착한 나는 ‘자애산부인과’라는 병원을 발견하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종로 대로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렇듯 이 병원도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허름했지만 안쪽은 제법 밝고 깨끗했다. 대기실에는 열댓 명 남짓의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여자들과 같이 온 남자들 서너 명도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나는 접수처로 가서 임신 검사를 하러 왔다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건네준 신상 기입 용지에 기혼자라고 적어 넣었다. 

     나는 숙맥처럼 굴지 않기 위해 어젯밤 인터넷으로 산부인과 진료 절차에 대해 꼼꼼히 조사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임신한 미혼녀들의 경험담과 조언을 숙지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공짜로 나누어주는 둥굴레차 한잔을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아 차분히 여성 잡지를 펼쳐 들었다.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그렇게 내내 잡지 위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을 참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나는 고개를 들고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하고 진중했다. 아이들 취향의 장식도 없었고, ‘축복’이니 ‘행복’을 과시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직 ‘대기실’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완고함까지 느껴졌는데 그것은 적절한 배려였다. 여기도 다른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 다시 - 태어나고 누군가는 생명을 잃는 병원일 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문득 예전에 들었던 괴담 하나가 떠올랐다. 평소 아기를 가지려고 갖은 노력을 하던 한 여자가 생리가 멈추고 배가 불러오자 임신일 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검사를 해보니 자궁에서 자라고 있던 것은 아기가 아니라 암 덩어리였다. 의사는 즉각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여자는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마치 진짜 태교라도 하듯이 뱃속의 암 덩어리에게 애정을 쏟았다. 몇 달 뒤 여자는 극심한 산통과 함께 암 덩어리를 쏟아냈는데, 주먹만한 암 덩어리가 갓난아기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더라나. 

     나는 곁눈질로 옆 사람을 흘끗 쳐다보았다. 내 옆자리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아기 둘쯤은 너끈히 들어갈 법한 커다란 배를 받침대 삼아  육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배는 배꼽까지 팽팽하게 불거져 있어서 손만 대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았는지, 아니면 누군가 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자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저, 몇 개월이세요?”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더니 둔한 몸을 애써 일으키며 대답했다.

     “이제 9개월 지났어요. 2주 후가 출산 예정일이에요.”

     “아유, 그러시구나.”

     “병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예. 임신인 것 같아서 검사해보려고요.”

     “첫애예요?”

     “네에.”

     “어머, 떨리시겠다. 저도 이번이 첫애예요. 처음에는 실감도 안 나고 언제 애가 나오나 싶더니만 벌써 코앞이네요. 아마 그쪽도 금방일 거예요.”

     “첫애면 남편 분도 엄청 좋아하셨겠네요.”

     “말도 못하죠. 우리 애 아빠는 벌써 축구공까지 사다 놨다니까요. 아, 얘가 아들이거든요.”

     여자는 자기 만족에 겨워 커다란 배를 위아래로 흔들며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이 아이의 성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남자 아니면 여자일 텐데 말이다.

     “김민주 님, 김민주 님, 3번 진찰실로 들어오세요.”

     갑자기 간호사가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 바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의 이름을 저렇게 공공장소에서 공공연히 외쳐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상기된 얼굴로 허둥지둥 간호사가 가리키는 진찰실로 들어갔을 때 나는 또 한 번 아연실색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남자일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굳이 여자 의사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고작 대여섯 살 정도가 많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임신 검사하러 오셨다고요?”

     가르마를 단정히 타고 입술이 유난히 얇은 의사는 자리에 앉은 내게 깍듯이 목 인사를 하고는 컴퓨터로 무언가를 입력하면서 말했다. 

     “예, 예. 아무래도, 임신인 것 같아서요.”

     “생리일은 보통 언제시죠?”

     “그러니까 2일이나 3일쯤 돼요.”

     “예, 그럼, 마지막 생리일은요?”

     “두 달 전이요.”

     의사는 재빨리 무언가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임신 진단 시약 테스트 같은 건 해보셨어요?”

     “예?”

     “약국에서 파는 거요. 안 해보셨어요?”

     의사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계속 자판기를 두드려댔다.

     “아, 예, 그거, 임신 테스트기, 했어요. 저기 파란 선 나오는 거, 그러니까 그게 선이 두 개가 나와서, 그게 임신이거든요.”

     나는 순간 말이 꼬여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의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검사는 다시 해볼 필요가 없겠네요. 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해보실래요?”

     “제가 두 번 해봤는데요.”

     “두 번째도 선이 두 개가 나왔다는 말씀이시죠? 그럼 임신일 가능성이 높네요. 일단은 초음파검사를 해볼 겁니다. 아, 그런데 이번이 첫 임신인가요?”

     “예에.”

     “그렇군요. 좋습니다. 하 간호사, 이분께 검사복 드리고 검사실로 모시고 오세요.”

     간호사는 나를 벽장만 한 크기의 작은 탈의실로 데려갔다. 나는 간호사의 지시대로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연분홍색 검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사복은 헐렁한 원피스 잠옷처럼 치마 품이 아주 넓어서 움직일 때마다 밑으로 세찬 바람이 들어왔다.  

     검사실로 가보니 방 한가운데에는 치과에서 쓰는 것과 비슷하지만 두 배쯤 더 커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주변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기계들이 잔뜩 늘어서 있고 독한 소독약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의사는 반투명한 노란색 고무장갑을 끼고 다시 나타났다.

     “자, 일단 여기 누우세요. 편하게요. 네, 그렇게요. 먼저 설명 드릴게요. 지금부터 초음파검사를 할 겁니다. 이 막대기 같은 거 보이시죠? 이걸 질 안으로 넣어서 내부를 초음파로 보는 겁니다.”

     그는 얇고 가느다란 금속 막대기가 달린 기구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긴 전선을 통해 모니터가 달린 기계와 이어져 있었다.

     “초음파검사는 배 위에다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놀라서 외쳤다.

     “아, 그건 임신 3개월, 4개월이 지나야 하는 거고요, 임신 초기에는 아이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통 이렇게 합니다. 괜찮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아프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간호사가 도와주는 대로 다리를 벌렸다. 환한 전기 불빛 아래서 내 벌거벗은 몸은 마치 소금을 뿌리기 위해 반으로 갈라놓은 축축하고 비린 고등어처럼 양쪽으로 활짝 벌어졌다. 뻥 뚫린 구멍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고 들어와 내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도 의사도 간호사도 태연하게 침묵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겁에 질린 채 내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수상한 기구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집게들, 핀들, 길쭉한 기구들과 호스 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느새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는 의사도 수상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병원은 세상의 상식도, 윤리도, 정의도 통하지 않는 유일한 치외법권, 가장 비현실적인 실체의 공간이 아닌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현존을 선포해 주고, 사망 선고를 받기 위해 이미 죽은 자들이 끌려가는 곳. 

     “자, 시작합니다. 허리를 펴시고 다리를 더 넓게 벌리세요. 긴장 푸시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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