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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25. 2024

좀 더 순진하게 (44)





     “나 요새 살쪘는데.”

     나는 짐짓 엄살을 부렸다.

     “야, 친구끼리 뭐 어떠냐. 나도 허벅지하고 뱃살 장난 아니야.”

     수연이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한마디를 더 보탰다.

     “원래 목욕탕을 같이 가야 진짜 친구가 되는 거야.”

     이러니 더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우리는 샴푸와 세면도구, 수건 등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수연이는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21살의 조로증 남자의 사연에 대해 수다스럽게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목욕탕에 갈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 샤워할 때 더 꼼꼼히 씻는 건데, 입고 있는 속옷은 깨끗할까, 얼굴이 붉어지면 어쩌지 등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15분 정도를 걸어서 우리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개업 축하 문구가 적혀 있는 붉은 리본이 달린 화환과 화분 수십 개가 건물 양 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고 한낮인데도 입구부터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었다. 수연이는 대뜸 욕탕 수질을 우려하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오히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계산대에서 돈을 치르고 사물함 열쇠와 수건을 받아 들었다. 개업 기념품이라며 준 플라스틱 칫솔도 하나씩 챙겨 넣었다. 우리는 오른편에 있는 여탕 문을 열고 문 앞에 세워놓은 가림막을 돌아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탈의실 안의 광경이야 빤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야 알몸의 여자들이 우글우글하겠지. 하지만 막상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이상한 광경이었다. 감출 것 없이 환한 전깃불 아래에서 수십 명의 여자들이 전라의 혹은 반라의 모습으로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팬티만 입고서 머리를 빗고 있는 여자, 브래지어만 걸치고 몸무게를 재고 있는 여자, 알몸으로 평상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발톱을 깎고 있는 여자, 바디크림을 바르며 두 손으로 젖가슴을 마사지 하고 있는 여자, 엉거주춤 무릎을 벌리고 서서 수건으로 가랑이를 닦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네다섯 살의 작은 계집아이부터 온몸이 주글주글 늘어진 할머니까지 모두 몸을 활짝 뒤로 젖히고 내 앞을 건들대며 지나갔다. 나는 그만 얼떨결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뻔했다. 같은 여자인 나에게도 (게다가 여자와 섹스까지 했는데도) 이렇게 거리낌 없고 무심한 나체는 무도한 것, 심지어 불경한 것처럼 여겨졌다. 옷과 함께 연약한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고무처럼 단단하고 비인간적인 몸뚱이들. 옷을 입은 여자는 죽일 수 있어도 나체의 여자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훼손될 지언정 인간의 몸은 원형적인 것이니까. 이 옆의 남탕에서도 벌거벗은 남자들이 서로 아랑곳 하지 않고 다리 사이로 늘어진 성기를 흔들며 엉덩이를 긁으면서 여러 가지 용무를 보고 있겠지. 같은 성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토록 경계심과 수치심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타인’에 대한 정의와 경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거나 훨씬 더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에 오래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수연이가 멀뚱히 둘러보는 나를 사물함 쪽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두 사람의 사물함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는 열쇠로 천천히 사물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더 천천히 옷을 벗었다. 부당한 일을 타의에 의해 저질러야 할 때처럼 온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벌거벗은 채 의자 위로 다리를 번갈아 올리며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녀의 사타구니에는 유난히 털이 적어서 모든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대체가 이 사람들이 잘못된 건지 내가 잘못된 건지 희진이에게 전화라도 해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대한 느릿느릿 옷을 다 벗고 사물함 문을 닫았을 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수연이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멀건 이마쯤을 보려고 했지만 동그란 어깨 아래 맞물려 있는 겨드랑이와 뾰족한 젖가슴, 하얀 배,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거뭇한 부분까지 놀라울 정도로 짧은 순간에 모두 훑어보았다. 수연이는 세면도구를 챙겨서 곧바로 욕실로 앞장섰다. 나도 수연이 뒤를 따랐다. 사선으로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검은 점이 도드라지는 그녀의 둥근 엉덩이와 그 사이의 깊은 골이 내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봐야 할지 피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기 힘들었다. 똑바로 보자니 똑바로 볼 이유가 없었고 피하자니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감상하지도, 만지지도, 맛보지도 않을 거라면, 도대체 이 적나라한 나체쇼가 왜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욕실로 들어가 보니 실내는 생각보다 넓었다. 바닥에는 평평하고 넓적한 회색 돌들이 깔려 있고 벽에는 하늘색과 흰색 타일들이 지그재그로 일정한 문양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수많은 분홍색 몸뚱이들이 흐느적거리는 게 보였다. 안쪽으로는 둥근 모양의 커다란 탕이 여러 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녹차탕, 황토탕, 허브탕, 와인탕 등의 팻말이 각각 붙어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나는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나중에 보니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는 게 암묵적인 예의인 듯했다) 황토탕 안으로 들어갔다. 황토가 섞인 물은 탁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희미하게 진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탕 안에는 수연이와 나 외에도 젊은 여자 두 명과 중년의 여자 세 명, 그리고 머리숱이 많이 남지 않은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작은 두 손을 모아 주름진 얼굴을 몇 번인가 문지르더니 곧바로 졸기 시작했다. 중년의 여자들은 조그만 목소리로 어떤 남자의 흉을 보고 있었고, 젊은 여자들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천민자본주의와 경제 윤리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뒤섞인 그들의 목소리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얼마 안 가 먼 메아리처럼 잦아들었다.

     수연이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이제야 살 것 같다면서 몇 번이나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눈을 감았다.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그녀의 긴 목에서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수연이를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눈꺼풀에 맺히는 물방울들을 털어내며 흠뻑 젖은 나신들을 훔쳐보았다. 그중에는 눈여겨볼 정도로 아름다운 몸도 있었고, 역시나 눈여겨볼 정도로 형편없는 몸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거기서 다 거기라는 식이었다. 최소한 이 안에서는 말이다. 같은 성별이라서가 아니라 아예 성(性) 자체가 없는 것 같은, 나와 너의 차이를 구분할 충동을 잃은 것 같은, 순진한 척할 만큼은 아직 순진한 것 같은, 이 나른한 동질성이 나 역시도 사로잡았다. 나는 슬쩍 옆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물 위로 솟구친 수연이의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커다란 젖꼭지 두 개가 호두처럼 불거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보니 세상 한구석에 이런 비무장지대가 하나쯤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우리가 목욕탕에서 나온 건 한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지치고 또 한편으로는 개운했다. 수연이 역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따듯한 온기가 돌고 젖은 머리카락이 기울어진 햇빛을 받아 새까맣게 반들거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떼 주었다. 수연이에게서는 비누 냄새인지 샴푸 냄새인지 모를 좋은 냄새가 났다. 같은 비누와 샴푸를 썼으니 내게서도 같은 냄새가 나고 있을 것이다. 그 때 수연이가 불쑥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마치 여중생들처럼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수연이와 현기 집에서 수연이, 나, 희진이, 현기가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박물관에 다녀온 후로 네 사람이 모두 모인 건 처음이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수연이와 내가 세 시간이나 땀을 흘려가며 삼계탕을 만들었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현기는 혼자서 한 마리 반을 먹어치웠고 입맛이 까다로운 희진이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닭의 쇄골 뼈로 행운을 점칠 수 있다는 현기의 말에 식탁 한가운데 수북이 쌓아놓은 닭 뼈를 뒤지다가 모두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곧 다가올 총선과 요즘 매 주말마다 열리고 있는 길거리 시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만약 우리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제3자가 함께 있었다면 이 광경에 기가 차서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분명 다른 저의가 있다고 의심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고깃국물이 흥건한 식탁 위에서는 은밀한 시선과 웃음이 교차하고, 서로의 다리가 부딪히는 식탁 아래에서는 위선, 기만, 불안, 도취, 애증이 모두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 거라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 모두가 궁지에 몰려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거기에는 그 어떤 막다른 이면도 없었다. 우리는 정말로 맛있고 즐겁게 식사를 했고, 가까운 친구들끼리의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한 점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저 이것은 이것대로 이것일 뿐이라는, 구차한 동어반복의 궤변으로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실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모든 긴장과 불안과 억지가 중화되는 그 어떤 정확한 지점에 우리는 함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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