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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09. 2024

좀 더 순진하게 (42)




     

     그로부터 5일 뒤에 나는 월차를 내고 회사를 빠졌다. 수연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부터 나는 수연이와 단둘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꽉 차 있었다. 나는 거진 한 달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고, 그것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수연이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건물 공사 때문에 하루 쉬게 되었다는 거짓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수연이는 퍽이나 반가워했다.

     “아, 그래? 그럼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와. 나도 별 약속 없는데 잘됐다.”

     수연이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걸 나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 희진이와 나 외에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서는 현기가 저녁 6시가 넘어서 돌아올 때까지, 창밖으로 그림자가 지나가는 적막한 아파트 안에서 수연이가 온종일 혼자 뭘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 평일의 밝은 한낮이야말로 수연이의 가장 은밀한 시간일 것이다.

     내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수연이가 얼른 문을 열었다. 어깨까지 내려왔던 그녀의 단발머리가 목이 훤히 보일 만큼 짧아져 있었다. 그것은 수연이에게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도 들었다. 내가 새로 바뀐 머리 스타일을 칭찬하자 그녀도 크게 기뻐했다.

     “커피 한잔 마실래?”

     수연이는 부엌으로 들어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다. 그녀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슬그머니 마룻바닥을 훑어보았다. 그날 현기와 뒹굴었던 자리였다. 하지만 햇빛이 어룽거리는 오전의 거실은 비 내리던 그날 밤과는 전혀 다른 곳인 것 같았다. 나는 왼발 엄지발가락으로 슬그머니 그 자리를 문질렀다.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는 범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어졌다. 내가 돌아간 후 흔적을 지우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걸레질을 했을 현기를 생각하니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뭐해?”

     수연이가 커피가 담긴 머그컵 두 잔을 양손에 들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커피를 받아 들며 수연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엄지발가락으로 마룻바닥을 꾹꾹 문지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수연이는 그저 천진한 얼굴이었다. 나는 저절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수연이를 비웃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선뜩하게 날이 선 무언가가 머릿속을 간질이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

     내가 소파에 앉아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물었다.

     “별일 없지, 뭐. 매일매일 똑같아.”

     “그래? 현기 씨는 어때?”

     “오빠도 별일 없어. 학교 때문에 늘 바쁘지. 늦게 들어오는 날도 많고.”

     “그래도, 현기 씨가 잘해주지?”

     나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외도하는 남편들이 부인에게 더 잘해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현기도 갑자기 꽃다발이나 값비싼 목걸이 같은 걸 사와서 수연이를 기쁘게 해주었을까?

     “그냥 그래. 남자들이 그렇잖아.”

     수연이는 애매하게 대답했고, 그것은 내게 더욱 애매하게 들렸다. 현기가 남자들의 대표도 아니고 남자 역시 현기의 대표가 아닌데 말이다. 아니, 정말 그럴까? 나야말로 남자들의 대표인 현기와, 혹은 현기의 대표인 남자와 섹스를 했던 게 아닐까?  

     우리는 잠시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부드럽고 한가한 한낮이었다. 만약 희진이와 단둘이 있었다면 이 틈에 섹스라도 했겠지만 수연이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가끔씩 눈을 마주치면서,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 얘기도 한 번씩 꺼냈다가, 다시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거실 창을 통해 초여름 햇살이 천천히 거실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색함과 편안함이 뒤섞인, 긴장과 나른함이 뒤섞인, 그러나 결코 불쾌하지 않은 애매함이 공기 중에 뿌연 먼지처럼 가득했다. 지금 이 느낌이 나만의 것인지 아니면 수연이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서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서도 함께 공감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궁금했다. 나는 이대로 수연이를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 중요한 장면에서 정지시키듯, 모든 걸 멈추어놓고서 속이 풀릴 때까지 샅샅이 그녀를 관찰하고 싶었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 사랑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막상 그런 기회가 온다 해도 나는 그만 견디지 못하고 겁쟁이가 되어 그녀의 몸에 손을 대고 말까? 

     “우리 뭐 할까?”

     다 마신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수연이가 내게 물었다. 나 역시 별 대책이 없었다. 

     “글쎄, 뭐, 앨범 같은 거 있으면 구경할까?”

     “앨범?”

     “사진 앨범 말이야.”

     “아, 있긴 한데 정리가 하나도 안 돼 있어. 서울에 올라오면서 대충 쑤셔 담았더니 온통 뒤섞여서 엉망이야. 정리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계속 미뤄왔네.”

     “그럼 같이 정리하자. 그런 건 혼자서는 잘 안 하게 되잖아. 같이 하면 금방 끝날 거야.”

     수연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곧 작은방으로 들어가 여러 개의 앨범과 크고 작은 봉투들을 들고 나왔다. 그 사이 열린 문틈으로 나는 작은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이삿짐과 가구들, 종이 박스들이 층층이 쌓여 있어서 어둡고 음침해보였다. 아직까지 방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니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짐들 뒤로 수연이의 책상도 언뜻 보였다. 수연이는 그 뒤로 그림을 더 그렸을까? 아니면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내팽개쳐두었을까? 어쩐지 예전에 보았던 물속의 소녀를 계속 반복해서 그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색색가지의 사진들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쏟아놓고서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은 독사진과 단체 사진을 따로 분류하고, 단체 사진을 다시 가족사진과 친구들 사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각각 시간 순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두 손을 뻗어 가슴께까지 쌓여 있는 사진 더미를 뒤적였다. 거기에는 온통 수연이 투성이였다.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수연이의 현존이 떡하니 내 앞에 앉아 있는데, 탁자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수연이들의 시선들 때문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소리로 비유하자면 수천수만 개의 목소리가, 그것도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과거와 미래의 사방에서, 동시에 다른 얘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중에서 언뜻 눈에 띄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분홍색 장미 넝쿨이 우거져 있는 울타리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집안 행사라도 있었는지 어른들 모두 정장을 빼입고 있었고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수연이 역시 특별한 날에만 허락되었을 빨간색 공단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그녀의 깡마른 체형과 남자아이처럼 짧게 자른 머리가 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사실 처음에는 그 사진 속 다섯 명의 아이들 틈에서 수연이를 찾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수연이 얼굴이 원체 특징이 없는데다가 어릴 때라 인상이 더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연이의 처진 눈매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건 우리 고모 결혼식 때 사진이야. 아마 내가 초등학교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야. 여기 이 뒤에는 우리 아빠하고 엄마, 이분은 할머니, 오빠, 그리고 작은아빠, 사촌들.”

     나는 수연이의 처진 눈매가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는 걸 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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