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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01. 2023

좀 더 순진하게 (33)



     


     고개를 젖히고 한참 동안 멍하니 탑을 올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수연이와 희진이가 탑 주위를 서성이면서 무언가 긴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별히 나를 제외시킨 건 아니었지만 나를 상관하지 않고 있는 건 분명했다. ‘원래는’, ‘사람 일이란’, ‘깔끔하게’, ‘그런 게 아니라’, ‘사장님이’ 등의 몇몇 단어들이 간간이 들려왔는데 그나마도 그들이 탑 반대쪽으로 걸어가버리자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솟아 있는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탑이란, 아무리 높고 거대할지라도, 결국은 저 작은 한 점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조잡과 번잡으로부터, 최대한 멀리까지, 밀고 올라가, 최대한 가까이에서, 빛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희진이와 수연이를 쫒아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현기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멋있죠?”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희진이와 수연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 탑에 대해서 혹시 아세요?”

     “저는 잘 몰라요.”

     “이 탑은 고려 시대 탑이에요. 뭐, 어디서 보니까 중국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탑이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경기도에 있던 걸 일본 놈들이 훔쳐 갔었는데 일본 학자들이 돌려주라고 항의해서 결국 다시 돌아온 거래요.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다가 여기로 옮겨진 거죠. 예전에 경복궁에서 봤을 때는 하얀 비둘기 똥이 덕지덕지 쌓여있고 먼지와 이끼로 뒤덮여서 온통 새까맸는데, 이렇게 실내에 있으니까 느낌이 전혀 새롭네요.”

     현기는 탑에 새겨진 조각이며 조형적인 특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나는 그중 대부분을 곧바로 잊어버렸다). 그는 유물이나 역사에 박식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우리가 사실상 초면이라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현기와 나는 얘기를 나누면서 회랑 반대편에 있는 불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연이와 희진이가 뒤로 처졌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지만 현기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불상을 한 바퀴 돌아 원랑선사탑비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희진이와 수연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음료수라도 사러 간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현기가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뭐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죠. 그 둘은 이런 데 별로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구요. 우리는 계속 구경이나 하죠.”

     현기의 말에 나는 내심 당황했지만 현기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아쉬우면 핸드폰으로 전화하겠죠. 괜히 시간 낭비 말고 그냥 우리끼리 가요.”

     현기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관람실로 올라갔다. 환하게 햇빛이 쏟아지는 1층의 복도와는 달리 그곳은 동굴 속처럼 깊고 어두웠다. 유물들은 옅은 조명 빛을 받으며 침묵 속에 놓여 있었다. 고적하고 한편으로는 괴괴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저절로 발소리를 죽였다. 그 무엇이라도, 예를 들면 당장 신고 있는 구두나 고장 난 믹서기 같은 것도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 어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현기는 반 발자국 앞장서서 걸으며 유물에 대해 하나하나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열심히 경청하는 내 태도가 현기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박물관이 싫었다. 산산이 부서져나간 이야기의 조각들이 사방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거의 죽었다는 사실에 겁에 질려 있거나, 발견되고 보존된 것에 안도하면서 필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것들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놓은 것인가. 그것은 보존하기 위해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전시하는 무기력한 자위행위의 반복일 뿐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단단한 유물로 남아 철지난 이야기들을 녹음기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미 억양을 잃었다. 그런데도 실존하기 위해 더듬더듬 자신의 실존을 복재하는 박물관은 일종의 치매 요양소나 다름없었다. 치료도 부활도 영면도 아닌 영원한 연명을 위한 곳.

     내 혐오감을 진지함으로 오해한 현기가 흐뭇하게 말했다.

     “민주 씨도 이런 데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수연이는 영 관심이 없어서 말이 잘 안 통하더라고요.”

     그의 말이 굉장한 칭찬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2층 관람을 끝내고 다시 1층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수연이와 희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리가 아픈데다가 배까지 고파서 이제 그만 쉬고 싶어졌다. 현기도 참다못해 수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어디? 카페? 카페가 어디 있는데? 1층 복도 끝에? 알았어. 지금 그리로 갈게.”

     현기가 혀를 끌끌 차며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 지금 카페에 있다네요. 보나마나 1층이나 한 번 휘익 돌아보고는 바로 카페로 직행해서 신나게 수다나 떨었겠죠. 맨날 만나면서 또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지.”

     박물관 전체는 한가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카페에 들어가 보니 희진이와 수연이가 기다란 10인용 테이블 끝에 비집고 앉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바닥이 드러난 주스 컵 두 개와 먹다 만 딸기 생크림 케이크 접시가 놓여 있었다. 현기가 손을 번쩍 들어 수연이를 불렀다. 그러나 주변의 소란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나직했기 때문에 수연이와 희진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머쓱해진 현기는 다시 소리 높여 부르는 대신 묵묵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현기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 있었어?”

     현기의 담담한 말투에 나는 실망했다. 현기가 그들에게 짜증이라도 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기는 가늘게 웃음까지 흘리며 그들 옆에 앉았다. 갑자기 이제까지 현기를 따라 어둡고 퀴퀴한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몇 백 년, 심지어 몇 천 년이나 된 물건들 사이를 기웃거렸던 나 자신이 초라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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