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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29. 2023

[연극] 곡비




연극 :  곡비

공연장소 :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공연기간 : 2023년 10월 24일 ~ 2023년 11월 5일

관람시간 : 2023년 10월 28일 오후 4시




   예전의 연극 감상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전박찬 배우를 좋아한다. 다소 딱딱하고 무심한 연기와 인간적이고 섬세한 표정의 부조화가 인상적이다. 가식과 죄의식의 온도차로 비뚤어져버린 그의 얼굴이 좋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그의 연기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지만 (참고로 나는 연기의 '연'도 모른다) 그는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의 작품 선택을  신뢰한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면서도 침묵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연극을 선택한다. 물론 그가 선택한 연극이 재미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언제나 보러 갈 가치가 있다.

   이 연극은 색자, 윤상화, 전박찬 배우의 삼인극이다. 모든 배우들의 몰입감이 상당히 좋았는데, 특히 윤상화 배우의 호소력 있는 연기가 인상 깊었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를 가까이서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재미가 톡톡하다. 소극장에서도 이런 경험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극 자체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곡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울어주기도 하지만 주로 장례식 장에서 본격적으로 운다. 그렇다고 봉사활동 같은 건 결코 아니어서, 제대로 보수가 있고, 직업 아카데미가 있으며, 나름의 지위와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전문직이 그렇듯 '곡비'의 세계에도 출세와 추락, 이상과 속물성, 인맥과 줄서기, 권력과 교만, 질시와 실망이 엇갈린다. 

      처음에는 '곡비'라는 가상의 직업이 재미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연극이 시작된 지 5분도 되지 않아 '곡비'가 '연기자'를 뜻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고 설마 아니겠지 하며 몇 번이나 자기부정을 했다. 비유가 애매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직접적이어서 '곡비'라고 쓰고 '연기자'라고 읽는 수준이었다. 비유를 통해 문학적으로 지평을 확대하지 못하고 그저 A=B라는 1차원적인 암호에 그칠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자신들이  '연기자'라는 걸 밝히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뻔한 '곡비'의 정체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황에서 다 함께 순진한 척 혹은 순수한 척 혹은 바보인 척 작위적으로 상황극을 이끌어 가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방어적'이라는 단어가 이 연극 전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인상인 듯 하다. 거창하고 애매하고 과장된 수사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같은 직업군끼리 모여서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떠들법한 평범하고 신세한탄조의 얘기들이 나열된다. 사실성, 진정성, 일상성 등등을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문학의 영역으로까지 승화되지 않은 얄팍함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냉담하게 감상평을 말할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인상적인 대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연기자가 연기자를 연기하는 연극 치고는 너무나 빈약하고 소심하고 자조적이어서 연기자가 연기자를 연기하는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인 내 가슴은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얘기여서 그랬을까, 연기가 훌륭해서였을까, 아니면 배우와 관객의 거리감이 좁혀졌기 때문일까, 배우들의 진정성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사실 한 달에 두, 세 번씩 연극을 보면서도 연기자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연극의 완성도가 높다고 해서,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배우가 눈물을 쏟는다고 해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그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순전히 내 기분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또 '연기'라는 기술에 과연 진정성이 무슨 소용인지도 불분명하지만,  때때로 그걸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연극이 그랬다. 그것도 세 배우 모두에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인 듯하다.

   예전에도 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연극배우들을 존경한다. 아니, 경이한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배우나 드라마 배우들은 연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말 뜻을 알 것이다. 희생은 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를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대사는 녹음될 수 없는 것이다. 희생양은 언제나 제단 위에서 산채로 뜨거운 피를 쏟아야 하는 것이지 냉동육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연극 배우는 인류를 대신해서 무대라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 십자가 위에서 죽고, 그 죽음을 통해 극장은 진공이 되고, 진공이 되어야 마침내 연극은 시작된다. 그 위로 이름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이야기가 흘러 바다를 이루고, 존재가 탄생하고, 세상이 시작된다.

   나는 그저 나와 같이 속물적인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 어떻게 그 모든 걸 견뎌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도 모두가 열광하며 발 밑에 몸을 던지는 슈퍼스타 예수와는 달리, 명예나 돈에 대한 보장도 없이, 몇 년씩, 몇 십 년씩,  어느 구석 어두 컴컴한 무대 위, 반 정도는 하품을 하며 끝나는 시간만 계산하고 있는 무신경한 관객들 앞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기를 반복하는 일. 그리고는 텅 빈 무대에 홀로 남겨져 모두에게 잊혀진 채 다음 조명이 켜질 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리는 일.  그나마도 불러주는 무대가 없으면 자신이 뭘 하는 사람인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일.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이 세상에 아직 신성함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오직 연극배우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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