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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5. 2023

[연극] 튜링머신



연극 :  튜링머신

공연장소 :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공연기간 : 2023년 11월 3일 ~ 2023년 11월 25일

관람시간 : 2023년 11월 4일 오후 3시




  

    개인적으로 실존 인물, 특히 현대의 인물을 모델로 한 소설이나 영화,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예술이란 어떤 의미를 (의미 없음의 의미일지라도) 도출하거나 부여하는 것인데, 의미란 인공적이고 작위적이며 종합적인 것이어서 실상 실제의 삶에는 그 어떤 의미도 (의미 없음의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런 작품들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들의 무작위적이고 모순되고 불필요한 정보들에 포위되어 옴쭉달싹 못하고 어중간하게 표류하다가 그의 업적에 기대어 적당히 교훈적이거나, 혹은 그의 불행에 기대어 적당히 감상적으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 연극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누누이 말했듯 나는 권위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기에, 분명 나 같은 인간을 저격하기 위해 가장 커다란 글자로 박아놓은 [프랑스 연극계 최고 권위 '몰리에르 어워즈' 주요 4개 부분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몰리에르 어워즈'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뭐 대단한 상이겠지. 그래서 나로서는 심리적 저항선을 훌쩍 뛰어 넘는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을 예매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연극은 실망스러웠다. 어찌나 실망스러웠던지 집으로 돌아와 허한 속을 달래기 위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찾아봤을 정도였다. 영화는 이 연극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원작에는 없는 페미니즘적 인물을  끼워 넣거나 사건과 대사를 재분배하는 등 다소 차이를 보였다. 좋은 소식이라면 최소한 이 연극이 영화보다는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이 연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치게 순한맛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끓이지 않은 데다 간까지 싱거워서 도대체 무슨 맛을 느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희곡이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가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단 말인가. 겉핥기식 이해와 세련된 기교의 결합은 오히려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진부하기까지 해서  도대체 작가의 시각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수학 천재에 대한 지적 접근이라고 하기에는 심리적 깊이가 부족하고, 정치적 희생에 대한 분노라고 하기에는 비극이 부족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기에는 이야기 구조가 잡다하고 진부하다. 그저 소녀 취향의 감상적이고 지적인 게이문학 정도의 느낌이랄까. 솔직히 그 마저도 집중력이 떨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소재의 신선함과 철학성, 거기에 인간적 비애와 비극의 깊이로 볼 때 이 정도로 순진하고 나태하고 산만한 작품이 나왔다는 건 괴상한 일이다. 심지어 주인공인 앨런 튜링은 실제로 마지막에 자살까지 함으로써 스스로 어느 정도 비극성을 완성해주고 있기까지 한 데 말이다. 그런 그를 고작 이렇게 가볍게 안부인사 정도를 하려고 망각과 고통 속에서 일으켜 세웠다는 것에 나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래도 이 연극에서 재미있는 점 한 가지를 뽑으라고 하면 한 배우가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며 등장하는 일인다역의 설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부터 계속 반복되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연극을 더 지루하게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일인 다역으로 등장하는 역할들은 마치 소음처럼 불필요하고 잡다하고 평면적이어서 차라리 1인극으로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분명히 하건대 이것은 희곡에 대한 비판이지 연기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연기자들은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소 집중하지 못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는데 연기자들에게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성 자체에 집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끝을 향해 달려가며 '앨런 튜링'에 대한 모든 걸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앨런 튜링, 그는 슬픈 인간이다. 그의 고독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겹겹이 층위를 이루며 그를 더 깊이 가라앉게 한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미테이션 게임' 안에서 최소한 4중의 게임을 (분명 그 이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데,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천재-기계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며, 그는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증명하면서 또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한 모순된 게임은 결국 간섭과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게임이 실패했다는 건 그가 실패했다는 뜻인가? 그는 그저 망가진 기계이고 모자란 인간인가. 우리는 그 답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무지가 우리 자신을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건지 아니면 기계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다만 그가 기계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소년의 이름을 붙여준 것은 기계에게서 인간을 기대했기 때문 아니다. 기계에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이 연극이 감상적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감상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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