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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6. 2023

[연극] 망각 전의 마지막 후회



연극 :  망각 전의 마지막 후회

공연장소 : 여행자 극장

공연기간 : 2023년 11월 2일 ~ 2023년 11월 12일

관람시간 : 2023년 11월 5일 오후 4시




   개인적으로 나는 연극 포스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매할 때마다 포스터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연극의 개성이나 감각이 포스터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포스터가 세련되지만 연극이 촌스러운 경우는 많아도 포스터가 촌스러운데 연극이 세련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 연극의 포스터를 보고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아, 이건, 뭐랄까, 좋다고 말하기도 나쁘다고 말하기도 거시기한, 난해함. 게다가 왜 포스터의 인물들은 모두 맨발인 거지. 나는 거의 이 포스터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이 연극을 보러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한 데다가 따로 대기 장소가 없어서 나는 20분가량을 다른 관객들과 함께 극장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때때로 그런 연극들이 있다. 관객의 대부분이 연극 관계자들의 가족이거나 지인이거나 해서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연극 말이다. 이 연극도 그랬다. 손에 꽃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바리바리 싸 온 커피며 빵, 과자 등을 극장 안으로 밀어 넣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 이건 조짐이 좋지 않은데. 어쩌면 돈을 주고 티켓을 산 사람은 나뿐인 게 아닐까.

    그런데 연극은 재미있었다. 어, 나는 실제로 당황했다. 기대감이 현저히 낮아져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이 연극은 재미있고, 신선하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반역적이었다. 관객에 대한 반역. 

    일반적으로 연극은 비밀을 관객에게 폭로하는 것이다. 비밀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설사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비밀을 모르더라도 관객에게는 솔직한 것이다. 비밀의 변증법에 따라 연극은 비극이 되고 희극이 되는 것이다. 비밀을 노출하고 해소하는 과정에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연극이다.  그것이 '전형적'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그 모든 걸 전복시킨다. 비밀은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비밀은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오직 관객만 모른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일반적인 연극이 비밀을 노출함으로써 그것이 비밀임을 알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이 연극은 비밀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비밀이 아님을 알게 되는 독특한 구조다. 등장인물들은 이 비밀을 공개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솔직하며 모든 걸 다 말한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다만 그것은 텅 비어있을 뿐이다. 마치 공기처럼. 공기가 없이는 세계가 존재할 수 없는데도 우리가 굳이 공기에 대해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건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밀을 누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함께 그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기 위함이다. 

     그렇게 이 연극은 철저하게 관객을 차단한다. 그런데 이러한 폐쇄성,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야말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벗어날 수도 없는 세계, 가족. 연극은 이야기와 서사와 비밀과의 단절을 통해 관객에게 내밀한 가족의 내면을 들어낸다. 아니, 드러내는 그들이 아니다. 관객이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내면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보다 그것에 익숙하고, 또 누구보다 비밀을 감추는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극은 아무런 '고백' 없이도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공감'이라는 면에서 결국 이 연극 역시 '전형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연극은 물리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가족'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혈연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연극에 대한 대략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어느 날 엘렌느와 폴이 피에르를 방문한다. 엘렌느는 남편 앙투안과 딸 리즈와 함께이며, 폴은 부인 안느와 함께 왔다.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피에르가 살고 있는 집이 엘렌느, 폴, 피에르의 공동 소유이며 엘렌느와 폴은 이 집을 처분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들이 형제지간일 거라고 짐작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면서 젊은 날 엘렌느와 폴, 피에르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 그들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이 연극은 끝까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는 근친상간적인 감정, 가정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욱여넣어지는 그 모든 수만 가지 감정과 관계와 사연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며,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만 피할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고, 그리워하면서도 잊고 싶어 하고, 소중한데도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나는 이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당신은 이 모든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거기에 엘렌느와 폴의 현재의 가족이 개입하면서 그들의 감정의 골은 더 복잡해진다. 언제나 그들의 가족에게는 이 오래된 '가족'이 유령처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모두가 다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리즈와 안느처럼) 사이일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종의 대가족을 이룬다. 엘렌느와 앙투안의 딸 리즈는 사실상 그들 모두의 아이이며 그들 모두의 유산이다. 결혼이란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구시대의 말은, 사실 본질적이고 영원한 진리라는 우리는 안다. 

   이 대가족의 중심에는 피에르가 있다. 어쨌든 엘렌느와 폴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 있지만 피에르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예전에 '가정'을 이루었던 그 집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도 않고 혼자 살아간다. 그는 마치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심지어 부모가 죽은 후에도) 아이와 같다. 피에르는 자꾸만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토로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걸 그는 모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 (그들에게 월세를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부재를 알리는 것. 그리하여 그는 예전의 가족들을 다시 그 '유령'의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 엘렌느, 폴, 피에르가 세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족의 기본 구성이 3명 이상이라는 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명이라면 가족은 비교적 쉽게 와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명이 되면 감정은 완전히 부딪히거나 결합하거나 해소되지 못하고 자리를 옮기며, 미루며, 혹은 떠넘기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동력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 아, 나는 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너무나 익숙해서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니까.  

    이 관계들에서 앙투안이란 인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눈치 없고, 무심하며, 둔하고, 수다스럽고, 물색없는 사람으로 행세한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인 지도 모른다. 그에게 특별한 배려나 의도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불안하고 불안정한 가족이라는 타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둥과 같다. 그는 무지와 무신경으로 혹은 의지와 이해심으로 이 모든 갈등과 모순을 감싸 안는다. 그런데 이것 또한 역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모든 걸 알지만 그 무엇도 알지 못한다(알지 못하는 척 한다). 우리는 모든 걸 기억하지만 모든 걸 잊는다(잊은 척 한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타인으로 남는다(타인인 척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한 타인은 없다. 

    이것은 가족에 대한 연극이 아니라 가족의 연극이다. 이것이 이 연극과 다른 연극들의 차이이다. 아마도 내가 본 연극 중에 가장 미시적이며 섬세한 연극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구질구질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보는 내내 즐거웠다.


     

     추신 : 그 어떤 배우도 맨발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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