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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6. 2023

[연극] 아메리칸 버팔로




연극 :  아메리칸 버팔로

공연장소 : 연우소극장

공연기간 : 2023년 11월 21일 ~ 2023년 12월 10일

관람시간 : 2023년 11월 25일 오후 4시




    저번 '망각 전의 마지막 후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메리칸 버팔로'의 공연장도 상당히 작은 소극장이었다. 20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15분가량을 입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연극 관계자들의 가족이나 지인인 듯 손에 꽃이며 간식 선물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리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많은 관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문제는 그중 많은 이들이 단체 손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떠들썩하게 서로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기에 바빴고 어떤 한 사람이 그들 사이를 다니며 식권을 나누어 주듯 연극 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아,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닌데. 내가 '문제'라거나 '식권'이라거나 '좋은 징조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건 보통 이렇게 단체로 극장을 찾은 분들 중에는 연극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상 이런 분들이 (연극의 질과는 상관없이) 관객석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고 그것이 전체 연극 분위기에 - 특히 소극장인 경우는 결정적으로 - 영향을 미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극장 문이 열리고 지하에 있는 공연장으로 서둘러 (비지정석이었기 때문에) 입장했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마도 나는 연우소극장이 처음인 듯한데, 상당히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공연장이라 하면 무대 정면이 관객석인 것이 보통이고 3면, 혹은 4면이 관객석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요즘은 드물지 않지만 2면이 관객석이라니? (앞 뒤로 2면이 아니라 앞, 옆으로 2면임) 독특하다기보다는 균형에 대한 강박이 있는 내게는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요즘은 잘 없는 벤치식 좌석이 아닌가. 만약 관객석이 한산한 편이었다면 딱히 이 벤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겠지만, 이 날은 단체 손님뿐만 아니라 일반 손님들, 연극 관계자들의 가족들과 지인들까지 몰려들어 극장 안은 만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는 이 벤치식 좌석의 진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거의 모든 좌석이 꽉 찼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자 4사람 정도 앉으면 적당할 벤치에 한 사람씩 더 끼워 앉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2명으로 이루어진 일행마저 각자 흩어져서 자리를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아무도 그것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유연함과 무던함이 야기한 혼란이 극에 달한 가운데 결국 5분 정도 공연이 늦게 시작하기까지 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붐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미 가슴이 상당히 무거운 채 연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연극이 시작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사방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대극장의 연극이나 뮤지컬, 하다 못해 음향 시설을 활용하는 중극장의 경우는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이렇게 작은 규모의 소극장의 경우는 핸드폰을 진동을 해 놓아선 안된다. 다른 관객들에게 발작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나의 편견인지도 모르지만) 단체 손님으로 오신 분들은 그 부분을 잘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사방에서 핸드폰 진동 환장 파티가 계속 이어졌고 나는 음소거를 해 놓은 내 핸드폰에서도 진동이 울리는 듯한 환각에 시달린 바람에 두 번이나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기까지 했다. (두 번째 확인했을 때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핸드폰 진동의 쓰나미는 점차 가라앉았지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짐으로써 다른 관객들은 분노보다는 자포자기로 내몰려야 했다.

    보통 글이 이렇게 시작할 때는 두 가지 중 한 가지 효과를 노리기 위함이다. 반전 효과이거나 복선 효과이거나. 이번에는 후자의 경우다. 이 연극은 내게 여러 면에서 다소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우선 연극 홍보 글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내가 이해하기로 이 연극은 '아메리칸 드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제목에 '아메리칸'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리고 주인공들이 한 탕 주의에 빠져있다고 해서, 그냥 기계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것은 오히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구질구질하며 잡스러운 삶에 대한 헌사다.  등장인물들은  야망이나 꿈조차 없는 하층의 소시민일 뿐이다. 이들이 자신들이 팔아버린 버팔로 동전을 되훔치려는 것도 억만장자가 되거나 팔자를 고쳐보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손해를 봤다는, 그리고 아마도 자신들은 언제나 늘 손해만 본다는, 삶과 비즈니스에 대한 공정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고집과 울분 때문에 벌인 일일 뿐이다. '그들이 동경했던 성공적인 아메리칸 드림은 잔혹한 속내를 드러내며 결국 환상이었음이 밝혀진다'라는 이 연극의 홍보 문구만큼 이 연극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조차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이 연극의 이야기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가 이 연극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 아니라는 건 확연하다. (솔직히 이 희곡 자체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 연극의 중심을 이루는 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대사인데, 캐릭터와 대사를 부각하기 위해 오히려 이야기를 약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연극은 모든 역량을 캐릭터와 대사 전달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내내  인물들의 캐릭터는 밋밋하고 단순하고 불분명했으며 대사들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극은 전체적으로 매력이 없고 지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애초에 이 연극의 미국 영어 대사를 자국어로 번역해서 공연하는 게 사실상 부적합하며 심지어 불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미국 문화와 미국 영어가 가지고 있는 리듬과 정서와 뉘앙스가 중요했을 것인데 그것을 한국말로 번역하다 보니 특유의 재미가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욕설로 웃음을 끌어내려고 과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 짐작이긴 하지만 원작에서 욕설을 특별히 강조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일상어로써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을 이 연극에서는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오히려 원작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불편하고 어색한 과장이 비단 욕설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연기 전반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연극은 다른 문화권에서 보편성과 전달력, 공감, 재미, 의미를 가지기에는 너무나 미국적이며 너무나  미국 영어적이다. 물론 그것을 재해석하고 재생산하면서도 원본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외국 희곡으로 공연하는 우리의 숙명이고 도전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연극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연극을 보면서 영화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렸다.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밑바닥 범죄자들의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밑바닥 인간미. 그러나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그런 범죄자가 될 깜냥조차 없는 순진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희극의 주인공도 비극의 주인공도 될 수 없으며 그 점에 있어서 우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연극이 차라리 웃음기와 과장을 싹 빼고 철저하게 밑바닥부터 차분하고 지루하게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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