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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03. 2023

[연극] 컬렉션





연극 :  컬렉션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공연기간 : 2023년 12월 1일 ~ 2023년 12월 10일

관람시간 : 2023년 12월 2일 오후 3시




   이 연극이 끝나는 순간 거의 모든 관객이 당황했을 거라고 (내 손목아지를 거는 따위의 천박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장담한다. 극장을 나서면서 여기저기서 너무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그들의 착각이다. 그들은 너무 겸손하고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연극의 문제는 어려웠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쉬웠다는 것이다. 너무 쉬운 나머지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겸손해지기 위해, 나 자신을 과소평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에 도착할 쯤에 내린 결론은 그게 다였다는 것이다. 

    이 연극은 마치 서스펜스, 미스터리, 탐정물, 수사물, 법정드라마처럼 자신을 홍보하긴 했지만 그런 장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소통의 연극이다. '소통의 연극'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소통에 대한 연극'과 차별을 두기 위함이다. 이 연극이 내부적인 소통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그러니까 연극과 관객 사이의 소통 자체까지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일은 똑같이 관객들에게도 일어난다. 여기에 등장인물과 관객의 차이는 없다. 

     이 연극은 일상의 대화에서 일상을 제거함으로써 비일상적인 대화를, 그리고 인간의 대화에서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비인간적인 대화를 재현한다. 그러니까 일상의 대화의 비일상성과 비인간성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등장인물 네 사람은 진실에서 괴리되었거나 애초에 진실이란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 아마도 연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이거나 형이하학적인 장소,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언어 속에 격리되어 있다. 언어는 행간으로 높은 벽을 세우는데, 이 벽 어느 곳에도 출구는 없다.

    얼핏 보면 이것은 배신과 치정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배신과 치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연극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의 진실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차 확신할 수 모호함, 그리고 단지 사실에 대한 무지함을 넘어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에서 비롯된 모호함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신과 치정으로 뒤얽혀버린 네 사람에게서 성적 코드가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제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런저런 성적인 해석이 가능한 정도는 남겨두었지만.) 이 인물들에게는 사랑도 욕망도 없으며 심지어 질투와 분노조차 불분명하다. 그 모든 것이 텍스트로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 억압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칼을 통해서 그 억압을 슬쩍 비추기는 하지만 다분히 소심하고 나약하다.) 마치 이들은 영혼이 없이 단지 수사적 언어로 움직이는 인형들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개성조차 흐릿하다. 사회적 배경이나 개인적인 사연 또한 최대한 제거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딱히 그들의 개성을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태지 못한다. (그들에게 개성이 있다면 그것은 텍스트가 보여주는 개성이 아니라 인간 배우의 실존이 전해주는 개성일 뿐이다.) 

    오직 그들의 성별과 그들 사이의 권력관계만이 현실 구조를 반영하는 데, 이것은 이 와중에 꽤나 두드러진다. 치정을 저질렀거나 치정으로 의심받고 있는 두 사람이 제임스의 아내인 스텔라와 해리의 동성애자 파트너이자 실질적인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빌이라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거기에 더해서 해리와 빌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계급 구조도 암시되어 있다. 현실 이면에 가리어져 있던, 관계와 언어와 진실의 모호성을 폭로하는 건 이들 여자들, 게이들, 약자들이다. 그들은 무대 밖에서 공모함으로써 (그들의 만남은 이야기 되어질 뿐 무대 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대를 봉쇄해 버린 범죄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가해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고, 권력관계의 전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당히 공을 들인 이 설정마저도 이 연극에서는 그리 힘을 쓰지 못한다. 우선 애초에 스텔라와 빌이 약자인가 자체도 불분명하다. 물론 텍스트에 그러한 권력관계가 스며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 희곡의 전체적인 논조와 비교해 볼 때 어쩌면 상당히 강조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연극에 동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런 모든 개인적인 조건들 속에서도 이 네 사람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이다. 스텔라의 남편인 제임스와 빌의 파트너인 해리의 유사성은 노골적이며, 빌과 스텔라 역시 의도적으로 상반된  태도를 취하면서 서로를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렇게 보면 '제임스와 해리'가 한 편, '빌과 스텔라'가 다른 한 편이 되어 서로 배치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이나 역할의 유사성 혹은 차이점은 극이 진행되면서 사실상 그들 모두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된다. ('같은 언어'란 영어나 한국어 같은 언어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존재론적 유사성을 지칭한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 그 언어는 일종의 거울이다. 절대적인 무감각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말을 똑같이 반복하거나 (거울처럼) 뒤집어서 반대로 말한다. 모든 게 표면에서 표면으로 반사되는 반영일 뿐, 내면은 없다. 내면이 없으니 경계도 없다. 경계가 없으니 시작도 끝도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대화를 멈출 수도 그 대화의 결론을 낼 수도 그 대화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대화는 시작도 끝도 의미도 없이 그저 계속되기 위해 계속될 뿐이다. 소위 그것은 인간적인 대화가 아니다. 기계들의 전자 반응이다. 유령들의 읊조림이다. 찢어진 텍스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이 무대 위는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인가?  

    이것이 내가 이 연극을 보고 느낀 점이다. 내가 제대로 파악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렇다 치자. 일단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그런데 내가 의문을 품는 점은 우리 모두는 이것을 일상 속에서 매일 매 순간마다 겪고 느끼며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입에 올리면 유치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이렇게 그대로 뚝 잘라 무대 위로 옮겨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의미'는 모호한 표현이니 다른 말로 바꾸어야겠다. 과연 이것을 이렇게 그대로 뚝 잘라 무대 위로 옮겨 놓는 것이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 연극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은 아닌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너무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보여준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함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하게 평범화시키는 연극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이 이 연극을 어렵다고 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당연하기 그지없는 것에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말이다. 과연 내가 매일매일 겪는 일을 내가 매일매일 겪는 방식으로 보기 위해 굳이 돈을 내고 극장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극적이지 않은 극은 결국 자기부정이 아닌지, 아니면 우리는 자기부정이라는 부조리까지 자기 긍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결국 이 모든 게 말장난이자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는 건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아니?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 연극은 자신의 할 일을 훌륭하게 해 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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