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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21. 2024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연극 :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장소 : 국립정동극장

공연기간 : 2024년 1월 20일 ~ 2024년 3월 10일

관람시간 : 2024년 1월 20일 오후 2시




   

   자, 새로운 레스토랑이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검색해 보니 별점도 제법 나쁘지 않다. 외식한지도 오래되었는데 한 번 가볼까.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흠이지만 뭐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나는 주말을 맞아 전철을 갈아타가며 돌고 돌아 레스토랑에 도착한다. 흠, 외관은 나쁘지 않은데. 간판도 촌스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일단 마음에 드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기대감은 더 올라간다. 널찍하고 전망이 확 트인 공간. 블랙 앤 화이트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인테리어. 장식으로는 하얀 벽에 걸린 파도치는 사진과 검은 벽에 걸린 거대한 전자시계뿐. 그리고 신경 써서 고른듯한 은은한 음악. 한마디로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 흠흠, 내가 검은색 철제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갈색 셔츠를  정갈하게 입은 직원이 잘 훈련된 친절한 미소로 내게 다가온다. 어떤 메뉴가 있죠? 내가 묻는다. 이곳에는 메뉴가 하나입니다. 직원이 대답한다. 음, 좋아요. 그걸로 주세요. 직원이 물러가고 나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한식? 중식? 일식? 이탈리아? 프랑스 요리? 퓨전일까? 아예 새로운 요리일지도 몰라. 뭐, 어떤 요리든 상관없어. 난 식욕이 넘치는 대식가니까. 이윽고 직원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난다. 먼저 잘 닦인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을 내 앞에 내려놓는다. 음, 좋아. 곧바로 새하얗게 빛나는 냅킨, 잘 딱인 나이프 하나, 두 종류의 수저와 세 종류의 포크가 나란히 놓인다. 흠, 무언가 다채로운 요리인 모양이군. 내 앞에 검은색의 커다란 빈 접시가 놓이고, 그 위에 그 보다 조금 작은 회색 접시가, 그리고 다시 그 위에 그보다 조금 더 작은 하얀색 접시가 놓인다. 오, 이것이 뭐, 그, 프랑스 다이닝 스타일인가. 어쨌든 정갈하고 세련되군. 나는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두 손을 비빈다. 자아, 마침내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금빛 접시가 접시들 꼭대기에 올려진다. 그 접시 한가운데에는 분홍색과 회색빛이 섞인 부드러운 거품 소스가 소복이 담겨있다. 요리는 접시 가장자리에 국물이 튀거나 손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다. 정말 고급스럽고 섬세해. 나는 감탄하며 한껏 고조된 채, 드디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소스 한가운데를 반으로 가른다. 어?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어? 나는 포크로 소스 안을 휘저어 본다. 어? 소스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오직 분홍색과 회색의 소스뿐. 흠, 무언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직원을 부른다. 친절한 직원은 얼른 내게로 다가온다. 저기, 소스 안에 내용물이 빠진 것 같아요. 아마 실수로 접시에 소스만 담은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한다. 아닙니다. 이것이 저희 요리입니다. 직원이 말한다. 이것이요? 내가 놀라서 묻는다. 정말 이것이 다라는 말입니까? 이게 완성품이라구요? 내가 다시 묻는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요리를 연구했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고 계획했던 그대로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하였지요. 우리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손님들도 대부분 만족하고 있구요. 정말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맛나게 거품을 떠먹고 있다. 심지어 허리띠를 끌르며 배를 두드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문다. 그리고 두 개의 수저 중 가장 작은 수저를 들고 검은색의 커다란 접시 위에 놓인 작은 회색 접시 위에 놓인 더 작은 흰색 접시 위에 놓인 더더 작은 금빛 접시 안의 분홍색과 회색빛이 섞인 부드러운 거품 소스를 떠서 입안에 넣는다. 이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떠세요? 친절한 직원이 내게 정중하게 묻는다. 

       이것이 어제 내가 처했던 상황이다.  

       나는 연극을 평가할 때 세 가지를 기준으로 한다. 첫째, 내게 영감을 주는가. 첫째, 완성도가 높은가. 첫째, 연기자의 개성과 연기가 좋은가. 보통 이 세 가지의 합산과 조율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데, 뭐, 때로는 그중 한 가지가 이미 100점 만점에 100점을 획득함으로써 평가 전체를 무력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딱히 정교한 작업은 아니다. 그중에서 '완성도'는 상대적인 완성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도를 뜻한다. 연극이 자신이 원하고 목적한 바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정확한 방식으로 충분히 드러내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관객은 구태여 그 작품에서 그 이상을 바랄 필요도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원하는 바를 아주 효과적으로 상당히 정확하고 영리하게 구현하고 있다. 배우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일인극인데도 배우의 존재감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 구성이지만, 호스트로써  극 전체를 잘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00점 만점에 완성도 50점, 연기 50점을 주었다. 그러면 영감, 영감은 0점이라는 말인가? 아니, 나는 영감에 -1000점을 주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은 연극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장기 기증에 대한 교육용 프로그램 (그것도 프랑스의 장기 이식 시스템에 대한), 그 이상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심지어 요즘의 교육용 프로그램에 비해 정보의 질이나 양이 현저하게 떨어지기까지 한다. 과연 이것을 극장에 가서 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제작했다면 훨씬 유익하고 효과적이고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공익 캠페인 수준의 이 연극을 보는 내내, 내가 돈을 내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살을 앓았다. 심지어 연극을 보고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장기 기증 협회에서 장기 기증 동의 서류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게 달려들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 망상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인터넷을 10분만 뒤져보아도 쏟아져 나올 이런 얄팍한 정보를 가지고 이토록 정성 들여 세련되게 나열하여 무대 위에까지 올릴 필요가 있었는지 난 정말이지 모르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별 차이는 없지만, 이 연극은 감상적인 선동의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적당히 사건과 감정에 거리를 두고, 장기 기증의 절차와 연관되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과 면면에 접근하고, 도덕적 평가를 자제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혹은 유지한 척하려는 노력은 엿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장치들도 역시나 얄팍하기 그지없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등장인물들에 대한 접근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전형적이라 모욕감이 느껴질 정도다. 예상 가능한 뻔한 캐릭터들이 예상 가능한 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보여주는 예상 가능한 뻔한 반응들.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물건처럼 분리되고 옮겨지고 장착되는 심장보다 더 핏기가 없는 평면적이고 인공적인 인물들. 뭐, 좋다. 어쨌거나 전체적인 조망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지극히 교육적이고 공공적이지만 짐짓 교육적이고 공공적이지 않은 척하면서,  최대한 공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치자. 그런데 그러한 (나쁜 균뿐만 아니라 좋은 균까지 포함한 모든 다채로운 생명 반응을 제거하는) 정교한 멸균의 위생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더 질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래 소독이란 완벽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이것은 완벽한 연극인가. 솔직히 이 세련되고 깔끔하게 잘 빠진 완성도 높은 연극에서 트집을 잡을 건 아무것도 없다. 마치 분홍색과 회색빛이 섞인 부드러운 거품 소스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메인 요리처럼 말이다.

     연극이 끝나고 주인공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내 심장은 전혀 뛰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연극에는 정작 심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정해지기 위해, 커튼콜 당시 2/3 이상의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 한 마디로 이 연극이 맛집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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