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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28. 2024

[연극] 안티고네




연극 :  안티고네

공연장소 : 뜻밖의극장

공연기간 : 2024년 1월 18일 ~ 2024년 2월 4일

관람시간 : 2024년 1월 27일 오후 2시



   

     이 연극의 안내 페이지를 다 보면  '워크숍'이라는 단눈에 띈다. (연극에서 '워크숍'이라는 게 정확히 뭘 지칭하는 건지, 연습이라는 건지 공연이라는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어쨌든 공연을 보는 입장에서는 '워크숍'이라는 단어가 좀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거기다가 3만 원이라는 티켓 가격이 딱히 워크숍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정식 공연이라면 워크숍이라는 자기변명을 해서는 안되고, 워크숍이라면 이 정도 티켓값을 받아서는 안된다.) 공연 시간도 1시간 10분에 불과하다. 보통 나는 이런 경우 그 공연을 보지 않는다. '워크숍'이라는 건 결국 완성품이 아니라는 자기 고백이고, 1시간 10분이라는 공연 시간 역시 (공연 시간과 작품의 질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안티고네'라는 고전 비극을 충분히 표현해 내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공연을 본 건 100% 순전히 포스터 때문이었다.

     내가 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연극 공연을 예매할 때 포스터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내용에 흥미가 끌려도 포스터가 형편없으면 망설이게 되고, 내용에 흥미가 끌리지 않아도 포스터가 그럴듯하면 역시 망설이게 된다. 이 연극의 포스터는 내 결정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시체를 검시하는 검시관이 여전히 자신의 실존을 주장하는 죽은 자의 인격을 극복하기 위해 시체의 얼굴보다도 손에 더 거부감을 느끼듯이, 이 포스터는 안티고네의 얼굴이 아니라 오빠의 무덤을 파느라 더러워진 그녀의 손에 주목한다. 이 포스터는 주체로서의 한 개인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더러워진 두 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손은 더러워진 자신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버리기보다는 오히려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코 앞에 보란 듯이 들이미는, 그리하여 자신의 범행을 숨김없이 자백하며 동시에 강요하는, 무죄를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를 주장하는, 폭력으로 저항하기보다는 떳떳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고 가녀린 어린 여자의 손이다.  예전에도 안티고네 연극을 몇 번 보았지만 그중 가장 훌륭한 포스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포스터의 연극을 보러 극장으로 갔다.

    물론 포스터의 완성도가 연극의 완성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연극은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솔직히 비싸다고 할 수 없는 3만 원이라는 티켓 가격이 비싸다고 여겨질 정도다. '워크숍'이라는 부연 설명이 짐짓 겸손이나 세련된 수사가 아니라 솔직한 고백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연극은 부분 부분은 완성에 가깝지만, 그리하여 대략 완성된 작품을 연상해 볼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휘갈긴 선에 불과한 스케치처럼 거칠하다. 공연은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완성된 결과물 자체를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기에 나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관객에게 돈을 받을 만한 공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무료 공연 후에 관객들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워크숍'을 진행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우선 전체적으로 진행이 너무 조급하다. 초조한 느낌마저 든다. 마치 책장을 마구 빨리 넘기는 것 같은 느낌, 혹은 대사를 까먹을까봐 빨리 다 말해버리고 싶은 느낌, 혹은 대관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추가 비용을 내지 않으려고 제시간에 끝내기 위해 서두르는 그런 느낌이다. 연극 전체가 뭔가 듬성듬성한데, 설사 지금 그대로의 짜임이라 해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침착하게 진행했다면 1시간 30분 공연은 충분히 나왔을 것이다. 비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긴박하고 속도감 있는 진행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건 이해하지만, 그것은 정서적 속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지 실제로 연극 자체를 2배속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연기자들의 섬세하고 치밀해야 할 연기마저 성마르게  뭉개지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었다. 이처럼 대사의 내용과 언어선택이 신중한 연극에서는 관객을 몰아치기보다는 쉼표와 마침표를 넉넉히 사용하여 관객들이 함께 숙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연극은 감정적 고조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성적인 고조 역시 중요하며, 사실상 그 둘이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연극 초반에 안티고네의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던 탈극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다. 전체 연극의 진행에서 이 부분이 딱히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리스 비극을 주제로 한 연극을 볼 때면 종종 탈극이나 인형극이 등장하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있는 상태라 더 거슬렸는지도 모르겠다. 비극에서 탈극이나 인형극이 등장하는 건 비극에서 희극으로 다시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자기부정적인 전복 효과와 함께 어떤 사건을 풍자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무엇보다 극적인 재미를 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그런 답습 자체가 식상하기 그지없다.  중요한 것은 탈극이나 인형극을 연극에 끼워 넣었다는 자족감이 아니라, 어떤 탈극, 어떤 인형극을 어떤 극 속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가가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 '안티고네' 공연의 도입부를 장식했던 탈극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한다. 미학적인 재미도 공연적인 효과도 없이, 그렇다고 딱히 신선한 의미 부여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뭔가를 후다닥 해치우고 지나간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바로 그다음에 등장하는 경비병들의 대화를 통해 오이디푸스 사건을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안티고네 배우의 발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본래 가지고 계시는 목소리의 톤 때문이긴 하지만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 전달력이 떨어지고, 발성에서 섬세한 표현이 되지 않다 보니 연기 자체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표정 연기나 신체 연기만큼이나 발성 연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공연 내내 그 부분이 편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연기자로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것 같다.

    자, 이만하면 이 연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는 실컷 한 셈이다. 아마 여기까지 내 글을 읽은 사람은 예매했던 티켓도 취소할 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보러 갈 가치가 없는가?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나는 - 이중인격자라는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지만 - 꽤나 인상적으로 이 연극을 봤다. 물론 그중 많은 부분이 희곡 자체에서 오는 감명이었지만, 안티고네의 샤워커튼씬에서부터 시작해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담 대결은 꽤나 긴장감 있고 재미있었다. 각자의 논리와 입장이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두 배우들의 기백 역시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불꽃을 튀겼다. 어쩌면 이 연극의 투박함이, 두 마리의 황소처럼 서로 단단한 이마를 부딪히며 싸우는 두 사람의 정면 대결에서는 오히려 진솔한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연극의 모든 기교마저 잊은 듯했고, 잠깐은 이것이 연극이라는 사실 자체마저 잊은 듯했다. 나는 앞에서 3만 원이라는 티켓 가격에 대해 불평하긴 했지만, 흠, 솔직히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나는 3만 원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

     이 연극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을 세대 간의 대립으로 좁혀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금 당장 원한다'는 안티고네의 대사도 좋았지만, '배가 좌초하는 데도 모두가 각자 자신의 신념과 이익을 위해 [아니]라고만 외칠 때, 누군가 한 사람은 [그렇다]라고 외치며 어른답게 모든 위험과 오명을 무릅쓰고 키를 잡아야 한다'는 크레온의 대사도  마음에 와닿았다. 세상 모든 일에 - 심지어 패륜이라는 자신의 기원에도 - 아무 책임이 없었던 안티고네야 이미 영원한 순교자요 젊음의 초상이며 권력에 굽히지 않는 순수한 자유의지의 화신이지만, 오이디푸스만큼이나 성공하고 타락하고 불행하고 번민했던 크레온에게도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안티고네'가 아닌 '크레온'이라는 비극 한 편이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안티고네의 두 손은 단지 무고한 흙으로 더럽혀져 있지만 -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손을 주저 없이 맞잡아줄 수 있지만 - 크레온의 두 손은 온통 피와 오물, 그리고 눈물로 젖은 채 언제까지나 홀로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정한 희생양은 죽은 자가 아니라 언제나 산 자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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