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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04. 2024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연극 :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장소 :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공연기간 : 2024년 1월 21일 ~ 2024년 3월 31일

관람시간 : 2024년 2월 3일 오후 3시





     나는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희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도 보았지만 - '몰리나' 배우의 연기가 큰 즐거움을 주기는 했지만 - 그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나치게 여성적이다. 그래서 이번 연극을 예매할 때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이 희곡은 대사 자체 보다도 그 대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배우로 하여금 희곡 전면으로 나서도록 강요하는,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는 희곡이기 때문에 나름 기대감을 가지고 예매를 했다. 까짓 거 좀 여성적이면 어떤가. 오랜만에 촉촉한 감성에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저 너무 푹 젖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났을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너무 축축했기 때문에? 아니, 나는 이미 젖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이건 너무 건조했다. 너무 건조해서 난 정말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불감증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였다. 혹시 내가 트집만 잡을 생각에 혈안이 되어 나도 모르게 교감하기를 거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오해인데, 내가 글은 싹수없이 쓰는 건 사실이지만 극장 안에서는 누구보다 협조적이고 온순한 관객이라는 걸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나는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운다. 물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욕을 바가지로 쏟아낼지라도 어둠 속 관객석에서 만큼은 아무도 보지 않는 관객의 역할을 언제나 충실하게 해낸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나는 그 어떤 관객의 역할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빠져나왔을 때도 나는 마치 그 공연을 전혀 보지 못한 사람처럼 너무나 멀쩡했다. 

    처음에는 원인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배우들이 연기를 못한 것도 아니고, 구성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니고, 무대 미술도 괜찮았는데 왜 나는 아예 간지럽지조차 않았던 걸까. 왜 - 내가 아니라 - 이 연극은 불감증에 걸려버린 걸까.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걸. 이 연극이 희곡을 온통 난도질해 놓았다는 걸.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출판 관행이 있는데, 고전 소설이나 장편 소설을 아동용이나 청소년 용으로 재편집해서 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소설을 자신들 멋대로 첨삭하고 편집해서 아무런 모순도, 어려움도, 거슬리는 것도 없이 아주 미끈하게 다듬어 혀 속으로 술술 굴러들어가게 만들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재편집한 책을 읽은 독자는 그 소설의 줄거리, 주제,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세세히 나열해 가며 어디 가서 그 책에 대해 발표라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알맹이는 홀랑 버리고 껍데기만을 취한 꼴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 원작에 대한 일종의 강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독자에 대한 강간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옷을 벗었다고 해서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가 이토록 자극적인 단어까지 동원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행태에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은, 특히 소설은 하나는 세계를 구성한다. 그것은 그 글의 어떤 옳음과 그름, 합리와 부조리, 고급과 저급, 장점과 단점, 보물과 오물을 모두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 그름과 부조리와 저급과 단점과 오물이 없다면 그 세계 자체조차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누군가 그것을 비평하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텍스트에서 삭제하거나 취사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의 겸허함으로 혹은 겸허함의 자유로 그 전체를  그 전체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전체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내가 재창조나 재해석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연극의 행태가 재창조나 재해석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검열, 일종의 세탁, 일종의 추행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특정 희곡을 공연화 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편집의 권리와 필요성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이 '거미여인의 키스'의 희곡 같은 경우 영화 내용을 설명하는 몰리나의 대사가 길고 장황한 건 사실이어서 만약 그 부분을 어느 정도 간추리는 정도였다면 나는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한 줄에 걸쳐 한 줄씩, 혹은 문단 전체를, 혹은 미세하고 미묘한  부분들을, 그저 표현하기 난해하거나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쫙쫙 함부로 매직으로 그어버린 행태에 대해서는 참아내기가 힘들다. 결국 희곡은 너덜너덜 걸레가 되었고, 공연은 반짝반짝 걸레질이 되었다. 

    [이 연극은  같은 감방에 수감된, 자신을 여자라고 믿는 '몰리나'와 반정부주의자 정치범 '발렌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감과 애정, 그리고 내면의 고백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이렇게 딱 한 줄로 요약해 버리고 끝내 버릴 수도 있다. 감상적이고 자극적이고 낭만적인 딱 그 정도의 여운을 적당히 풍기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기만 해도 그만 맥락 없이 울음이 터지고 마는 그런 착한 관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말이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작은 공간만큼이나 줄거리 역시 협소한 이 희곡 안에는 수많은 모순, 부조리, 혼란, 회한과 환상이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부조리, 혼란, 회한, 환상, 그러니까 그 세계 전체는 온전히 그것의 디테일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편의에 따라, 다시 말하지만 재창조나 재해석이 결코 아닌 그저 온전히 자신의 편의에 따라, 분명 '관객의 편의'라는 자기변명과 합리화에 젖어, 얼기설기 얽혀있는 가지를 다 쳐버린 이것은 나무가 아니라 매끈한 기둥, 아무 그늘도 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 연극에서 가장 손해를 본 건 '발렌틴'이다. '발렌틴'은 가시적으로 남성성을, '몰리나'는 가시적으로 여성성을 보여준다. 나는 서두에서 이 연극을 '여성적'이라 규정했는데, 그렇다면 '몰리나'가 주인공인 걸까? 그렇지 않다. 실상 주인공은 '발렌틴'이며 역설적이게도 마초적인 '발렌틴'이 실상은 가장 여성적인 존재다. 다시 말해서 이 연극을 '여성적'으로 만드는 것, 이 연극의 여성성을 완성하는 것은 몰리나가 아니라 발렌틴이다.  그는 누구보다 나약하고, 분열적이며, 혼란스럽고, 솔직하고 못하고, 감정적이다. 그는 모순 그 자체, 변덕 그 자체, 불확신 그 자체이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하고 누구보다 사랑을 원하며 누구보다 응석받이이다.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한편으로는 자의식에 가득 차서 모든 사람들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얕보는, 가장 원대한 이상과 가장 사소한 소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불행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발렌틴의 부조리한 심연이 바로 이 연극의 심연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그런 발렌틴은 없다. 여기서 그는 그저 얕고, 유아적이고, 무료하다. 말하자면 그저 남성적이다. 말하자면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인간적이지 않다. 그리하여 이 연극에서는 주인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연극도 관객도 모두 불감증에 걸려버린 것이다.   

   발렌틴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노동자 여인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어느 부르주아 여인을, 어쩌면 오직 부르주아 여인만을 사랑할 수 있다.  몰리나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원하지만  '남자인 여자'가 아닌 '보통 여자'만은 사랑하는 보통 남자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의 감옥, 각자의 지옥에서 영원히 홀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그 지옥이 합쳐질 때, -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 그것은 나은 지옥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다른 지옥일까? 그도 아니면 더 끔찍한 지옥인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지? 아니, 다른 지옥으로, 제발 이 지옥이 아닌 다른 지옥으로 보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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