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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12. 2024

[연극] DIE




연극 :  DIE

공연장소 : 대학로 나온씨어터

공연기간 : 2024년 2월 7일 ~ 2024년 2월 25일

관람시간 : 2024년 2월 11일 오후 3시





    창작자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자유가 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 그리고 그 '극단'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  그것이 무엇이든 허용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 비판받아서는 안된다. 내가 이 당연하기 그지없는 전제를 우선 깔고 시작하는 것은, 반대로 어떤 창작에 대해서든 관객에게도 역시 평가하고 비평하며 심지어 비난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한 마디로 너는 너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연극에 있어서 편향적인 정치색을 끼워 넣는 행위는 나를 역겹게 한다. 그것은 정치 성향다른 관객뿐만 아니라 중도적인 관객, 심지어 정치 성향같은 관객까지 역겹게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표현이 아니라 '끼워 넣는다'는 표현을 썼다. 개인적으로 내가 정치적인 연극인, 아니, 연극적인 정치인에게 권장하는 방식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오네스코 같은 대가를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아예 그런 자신의 편향적인 정치색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창작품을 창조해 내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색을 당당하게 내걸고 자신의 정치색에 동조하는 관객을 - 혹은 그런 관객만을 - 대상으로 정치의, 정치를 위한, 정치에 대한 수준 높은  연극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럼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 정치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희곡에,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은근슬쩍 자신의 편향적인 정치색을 대사 사이사이 불쑥불쑥 '끼워 넣는' 비겁함과 무례함이 나를 역겹게 한다. 다른 작가의 능력과 유명세에 얹혀  원작의 몇몇 단어를 바꿔치기하거나 몇몇 문장을 끼워 넣는 것이 자위적인 자기만족이나 내가 이만큼 의식 있는 사람이라고 으쓱거리고 싶은 자격지심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강조하건대 나는 고전이나 명작을 현재 우리나라 현실에 맞추어 적용하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풍자의 영역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현실 반영이나 풍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치기나 심통 수준에 불과하달까. 아마추어들이 함부로 원작을 가위질하듯 감흥도 미학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덧바르는 행위. 그러니까 비위를 정말 상하게 것은 정치적 편향성 보다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열함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을 정치적 선전 선동의 대상으로 얕보는 교만이며, 연극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공감과 내적 성찰을 방해하고, 원작이 애써 구축한 세계의 흥취를 짓밟고, 불특정 관객을 특정 유권자로 갈라 치기 하는 조작적이고 조잡한 행태일 뿐이다. 과연 그것이 창작자로서 옳은 선택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아, 물론 다시 말하지만 집토끼 관객에게만 어필하기 위해 일반 관객을 포기하겠다는 고도의 정무적이고 정치적인 전략을 택하는 것 또한 순전히 창작자의 자유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에, 그런데, 연극 감상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일정한 패턴이 생긴 것이, 보통 내가 쌍욕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말로 끝맺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내가 연극을 보면서 중간중간 역겨움을 느낀 건 사실이고 그것이 이 연극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을 싹 가시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모른 척 묻어두고 싶을 만큼 나는 이 연극을 재미있게 봤다. 최근 들어 내 연극 감상이  골룸 수준의 정신분열을 일으키면서 전체를 통합해서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 나는 이 연극이 재미있었다. 꽤나 즐거웠다. 일단은 희곡 자체가 흡인력이 있다. 이오네스코의 다른 희곡에 비해서 부조리성도 약하고 다소 진부하며 통속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의 희곡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배우들의 매력을 꼽을 수 있다. 사실 처음 도입 부분에서는 약간 유치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왕'이 등장하면서 극의 집중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왕' 배우의 외모는 첫눈에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 소위 영화계의 '왕'이라고 할 수도 있는 - 어느 유명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데, 그러한 '단점'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워서 대놓고 뻔뻔하게 그 배우를 패러디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전복시키며 재미와 의미를 다 잡아낸다. 글쎄, 어떤 관객은 유명 배우를 패러디한 '왕'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박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것도 분명 일리가 있지만, 그 '왕'의 존재감이 연극 전체에 활력을 주고 독특한 재미를 주었던 것만은 사실이어서 나에게는 긍적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왕'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와 감정 묘사도 설득력이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전체적으로  연극은 희곡, 연기자들의 능청스러운 연기, 활기찬 연출 등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나는 공연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연기와 대사에 온전히 빠져들었고, 신선함도 느꼈다. 잠재력에 비해 완성도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지만, 글쎄, 나는 개인적으로 딱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 연극은 한 우주의, 한 세계의, 한 사람의 임종의 순간을 공유한다. 공연 시간 1시간 30분은 임종의 순간까지의 1시간 30분이며, 관객은 임종의 참관인이 된다.  왕은 점점 죽어가다가 연극이 끝나는 순간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렇게 한 우주가, 한 세계가, 한 사람이, 그러니까 한 무대가 사라진다. 그렇게 관객은 다시 온전한 자신의 세계로, 언젠가의 틀림없는 임종이 예비되어 있지만 아직은 안전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희곡은 이오네스코의 작품 치고는 문학적 부조리가 그리 강하지 않은데, 그것은 어찌 보면 이 작품에서는 부조리가 따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이니까. 죽어가는 '왕'의 인이나 인생도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한 인간의 사실적 심정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지만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겪은 것 같은 근원적인 미래.

     나는 왕이었지. 나는 완전하고 절대적 인간, 이 세계 전체, 아니, 우주 체였지. 그러니 내가 결코 죽을 리 없어. 이 세계 전체가, 우주 자체가 죽을 수는 없는 거잖아. 누구나 결국 죽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죽어본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그건 끝까지 알 수 없는 거잖아. 죽을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거잖아. 그리하여 우리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 내가, 이 세계가, 이 우주가, 사라지는 순간, 진정 놀라고 말리라.  

     진부하고 진부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 '왕'을 통해 대리 임종을  경험하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끝까지 뒤끝을 보이는 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 솔직히 정치 편향성이 내 흥취를 깨지만 않았다면 나는 마지막에 눈물이라도 찔끔 흘렸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이 연극을 추천하겠느냐고 묻는다면? 흠, 분명한 경고와 함께, 추천해 마지않는다. 나는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편향적 정치 성향에 오염되지 않은 텍스트 원본을 읽기 위해 인터넷으로 이 희곡을 주문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딴지를 걸자면 왜 제목을 영문 'DIE'로 -  한국어 표기가 없음 - 한 것일까? 이오네스코가 영어권 작가도 아닌데다가, 한국어 번역으로 [왕, 죽어가다] 같은 좋은 제목이 있는데? 이건 또 어떤 정치적인 수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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