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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10. 2024

[연극] 줄리어스 씨저




연극 :  줄리어스 씨저

공연장소 : 한성아트홀 2관

공연기간 : 2024년 3월 7일 ~ 2024년 3월 17일

관람시간 : 2024년 3월 9일 오후 3시




    한 달 전만 해도 보고 싶은 연극이 넘쳐나서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관람을 했다. 아, 코로나의 긴 터널을 벗어나 2024년에는 마침내 연극계도 활기를 띄나 보다, 나도 돈과 몸을 바쳐 가열차게 연극을 관람하리라, 투지를 활활 불태웠었다. 그런데 갑자기 볼 만한 연극이 뚝 끊기더니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는데, 나로서는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래서야 한 달에 한 번 연극을 보기도 힘들 것 같아 (마지막으로 연극을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무조건 어떤 연극이든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고른 연극이 '줄리어스 씨저'였다.

    일단 내가 애초에 이 연극을 꺼려했던 건 포스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연극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 포스터라는 걸 (아니, 그럼 대체 관객은 뭘 보고 연극을 선택하라는 말이냐) 여러 번 밝힌 바 있지만, 이 포스터도 도저히 용납이 되지가 않았다. 취향이 나와 맞지 않는다거나 취향의 수준이 낮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아무런 취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포스터는 '줄리어스 씨저'라는 명제의 시각화 중 가장 무성의하고 가장 진부한 축에 속할 만하다. 구글에서 'julius caesar poster'라는 검색어만 쳐도 세련된 디자인이 쏟아져 나오는 판에 말이다. 차라리 그림을 빼고 크게 '줄리어스 씨저'라고 글자만 썼어도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언제나 나쁜 취향보다 더 나쁜 것이 무취향이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연극을 예매했다. 일단 셰익스피어를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햄릿' '멕베스' '오셀로' '리처드 3세' 외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너무 질적인 편차가 커서 다소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썼다고 알려진 작품들이 정말로 모두 셰익스피어 본인의 작품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언제나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만큼은 사실이어서, 나는 이 연극에도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나는 보통 연극 감상을 쓰면서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을 나란히 병행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 양쪽에 기계적인 양적 균형을 맞춰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연극에 대해서는 좋았던 점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이 연극의 좋았던 점이 거의 희곡에 속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점을 꼽아볼 계제조차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좀 가혹하게 얘기해야겠는데, 상황이 정말로 그렇다.

   일단 이 극단이 셰익스피어 희곡 전편을 하나씩 공연해 나가고 있다고 하던데, 그것부터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과연 그게 옳은 것인지, 일종의 어떤 자신과의 싸움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도장 깨기처럼 셰익스피어 희곡 전편을 훑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성경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하면 극단의 권위가 높아지거나 수준이 올라간다는 말인가. 희곡은 무엇보다 그 극단의 지향점과 비전에 맞는 것을,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사정과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차례차례 각개격파 하듯 일단 무대 위에 올린다고 해서 자부심을 가지거나 자존심을 세울 이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그 하나하나의 작품의 질적 완성도와 비전, 그리고 관객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창의성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건 이 극단은 '줄리어스 씨저'를 공연할 상황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씨저'는 그리 섬세한 희곡은 아니다. 진행이 다소 빠르고, 비약이 많고, 여백이 크며, 또 연설이 대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래서 해석과 연출, 일종의 편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이 연극에 과연 연출이 있었는지, 과연 해석이 있었는지 너무나 의심스럽다. 그저 날 것의 대사에 뻔하고 과장된 감정만을 욱여넣은 것이 전부인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받아쓰기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 어떤 심리적, 정치적, 현대적 해석도 찾아낼 수가 없으며 애초에 기대조차 할 수 없는 태만하고 무성의하고 무력한 연극이다.  연극은 반드시 희곡 이상이어야 한다. 아무리 그것이 그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라고 해도 그렇다.

    (지엽적인 부분이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무대 배경에 띄어놓았던 영상은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구글에서 다운 받은 것 같은 뻔한 사진들로 그저 장소 전환을 표시하기 위해 영상을 올리는 건 관객을 유치원생 취급하며 얕보는 것인가?)

     이 극단이 '줄리어스 씨저'를 공연할 상황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건 배우들에게서도 드러난다. '줄리어스 씨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등장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만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만의 장면과 대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면에서 만큼은 각자가 주인공이다. 그리하여 여러 주인공들 각각의 심정과 명분과 의지와 선택과 행위들이 모여 거대한 서사의 극적 흐름을 구축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희곡이 그리 섬세하지는 않기 때문에 배우들의 힘으로 그것을 보충하고 받쳐주며  스스로 입체적인 인물을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극 중에서  배우들은 그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그저 기초적이고 단편적인 감정 표현에만 급급할 뿐이다. 일단 연출의 문제가 가장 크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부 배우들의 역량도 부족다고 생각한다. 나는 극단들의 구조와 구성, 운영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역할에 맞지 않는 배우,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배우를 무대에 올리면 안 된다. 혹여나 한정된 인재 풀 안에서 웬만하며 다 참여시킨다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짬짬이로 서로 적당히 배역을 나눠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관객에게 돈을 받고 표를 팔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연극의 진행 속도다. 이 희곡은 대사가 많다. 이 대사를 제대로 다 소화하려면 최소한 2시간 30분에서 3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 연극은 1시간 40분 정도에 돌파하고 있다. 어떻게? 연극 진행 속도를 2배속으로 올려서 말이다. 나로서는 컴퓨터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빨리 돌린 적이  없는데 현장에서 연극을 실시간으로 빨리 돌려 보게 되다니, 이것을 배려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 보니 대사 처리 속도도 빨라져서 배우들이 발음이고 감정선이고 차분히 몰입해서 표현할 여력이 없다. 차라리 안토니의 연설 뒤에 전쟁이 발발하는 걸 암시하며 연극을 마무리하고, 내용과 표현에 충실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 연극은 마음이 온통 딴 데 가있는 것 같다. 히 이 연극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무조건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연극으로 무슨 기록이라도 세우려 하는가. 무슨 최초라는 타이틀이라도 따기를 원하는가?  다 좋다. 그러나 거기에 애꿎은 관객을 끌어들여선 안된다. 연극 관객은 스포츠 관람객이 아니다. 연극 관객은 응원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럼 관객은 왜 극장을 찾느냐고? 오히려 연극이 바로 그 답을 관객에게 알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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