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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31. 2024

[연극] 헬로 더 헬: 오델로






연극 :  헬로 더 헬: 오델로

공연장소 : 더굿씨어터

공연기간 : 2024년 3월 30일 ~ 2024년 4월 27일

관람시간 : 2024년 3월 30일 오후 2시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모든 관객이 떠난 후, 무대 뒤의 지옥에 홀로 남은 세 사람. 오델로, 이아고, 데스데모나. 나는 이 연극에 기대를 걸었다. 실패할 확률도 별로 없어 보였다. 셰익스피어가 이미 판을 다 깔아놓았으니 거기에 숟가락만 얹어도 중간 이상은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 연극이 잡아 든 숟가락은, 너무 길어서 음식을 자신의 입 안으로 떠 넣을 수 없다는 그 지옥의 숟가락이었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딱히 흠잡을 곳은 없다. 세 사람의 지옥을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간결하고 깔끔하다. 거기다가 데스데모나의 불륜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던, 비극의 방아쇠가 되어준 손수건의 활용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사실상 손수건이며, 이 세 사람을 함께 엮어놓은 쇠사슬,  바로 지옥 자체다.  이 손수건만 없었다면, 이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손수건을 미리 없앨 수만 있다면, 결말은 달라질까. 그러나 오델로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이아고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데스데모나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손수건은 거기에 있었다. 손수건은 오델로를 오델로로, 이아고를 이아고로, 데스데모나를 데스데모나로 만들며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그 손수건을 연극의 맨 앞 전면으로 끌어냈다는 것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솔직히 나는 그 손수건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연극을 보러 갈 의향이 있다. 전체적으로 연극은 지루하지 않았고 (사실 공연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용에 가까운 퍼퍼먼스도 인상적이었고, 계속되는 반복은 나 자신의 악몽을 연상시키기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냐고? 그러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마도 이 연극의 상대가 바로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라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 연극은 [오델로]의 지옥을 표방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미 셰익스피어의 [오델로] 자체가 완벽한 지옥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안일하게 한 때 유행했던 '도돌이표'를 첨가한다고 해서 이 지옥이 더 끔찍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연극은 수박의 빨간 속살을 보여주겠다며 수박에 칼을 대지만 이미 그 수박은 셰익스피어에 의해 바닥으로 던져져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 연극은 그 수박을 더 짓밟기보다는, 그 짓이겨진 수박을 입 안에 쑤셔 넣기보다는, 그 수박의 씨를 사람들의 얼굴에 뱉어대기보다는, 오히려 그 조각의 깨끗한 부분만 조심스럽게 모아 화채를 만들어 예쁜 그릇에 내놓은 격이다. 맥이 빠진다. 오히려 지옥은 사라졌다. 지옥의 붉은 패션만 남았을 뿐.  

     지옥의 지옥을 만들겠다는 이 연극의 도전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새로운 시도 없고, 상상력도 모호하고,  문학적으로도 빈약하고, 의지도 박약하고, 이미지 자체도 나약하다. 솔직히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에서 뭘 더 전달하고 싶은 건지 불분명하기만 하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오마주인 건 관객으로서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관객은 언제나 그 이상을 기대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연극에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스스로도 잘 모르는 느낌이다. 결국 이 연극은 지옥의 지옥이 아니라 그저 지옥의 모조품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작품을 살리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어야 한다. 배우 자체가 지옥이 되어야 한다. 오델로가, 이아고가, 데스데모나가, 한 명의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배우 스스로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부분에서도 다소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배우들의 잘못은 아닌데, 애초에 이 연극이 무책임할 정도로 배우들에게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하건대 배우에 따라 이 연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첨예하게 나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연극이 연극이 아닌 아예 전문 무용의 영역에서 표현되었다면 훨씬 더 창의적이고 성공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죽어서도 내가 나라면, 지옥에서도 내가 나라면, 과연 우리에게 지옥이 필요할까. 신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것마저도 달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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