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에는 여인들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지. 왕은 이 여인들이 함께 키우는 아기와도 같아. 세인들은 부럽다 하겠지만 실은 그게 어떤 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걸세. 부부의 정 같은 건 고사하고 남녀 간의 정분마저도 퇴색하고 마는 거야. 결국 나에게도 여인들에게도 의심과 굴욕만 남게 되는 거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또 어떻고. 그 애들은 지 어미들보다 더 냉담해.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냉담한 애비의 자식이기 때문이지. 그 애들이 내가 죽기를 바란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놀랄 것 같은가? 그 애들이 형제의 술잔에 독약을 푼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놀랄 것 같아? 나는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알아. 나도 나와 똑같은 아버지의 자식이니까. 아버지가 큰형을 가차 없이 세자 자리에서 내쳤을 때 내가 남몰래 숨죽여 웃지 않았을 것 같은가?]
나는 슬슬 취기가 오르면서 왕의 넋두리가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이 조선 천지에 그의 가정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아내의 따듯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이 모든 걸 한 사람이 다 견딜 수는 없는 거야. 한 사람에게 이 모든 걸 참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단 말이네. 뾰족한 꼭대기에 혼자 발가벗겨 세워놓고 이 모든 게 당연한 나의 권리라고, 동시에 당연한 그들의 권리라고 몰아세우다니. 혹여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이라도 진 건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내게 빚이라도 진 건가? 매일 이자가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데 아무도 갚는 자가 없어. 하지만 모두가 매일 땡전 한 푼까지 계산해서 장부에 적어놓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지. 그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한꺼번에 그 빚을 내게 청구할게야. 임종을 앞둔 내 머리맡에라도 그 장부를 집어던질 게야.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이 빚을 받아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 왕의 말은 거의 술주정에 가까웠다. 술잔에 따르는 술이 넘쳐흐르는 데도 왕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슬슬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핑계를 대야하나 궁리를 하고 있는데 잠시 침묵에 잠겼던 왕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외국을 오가는 한 상인을 만났네.]
왕은 급기야 한낱 장돌뱅이 얘기까지 꺼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다가 덥석 입을 다물었다. 왕의 눈빛이 세 개의 불빛을 받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관들은 반대했지만 나는 그를 처소로 불러 얘기를 나누었지. 그는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먼 나라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더군. 세상이 얼마나 넓으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네. 그리고는 조만간 더 먼 나라로 떠날 작정이라고 거들먹거리더군. 그는 예의가 발랐지만 거침이 없었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주눅 들지 않았어. 나는 곧 알아차렸지. 그가 내 앞에서 그저 시늉만 하고 있다는 걸. 그는 마치 거리에서 곡예를 하는 사당패를 구경하는 구경꾼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네. 누더기로 만든 곤룡포를 걸친 사당패가 [잘 알아 모시렸다]하고 소리치면 구경꾼들이 [예이]하고 맞장구 쳐주며 키득거리는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 그는 먼 나라의 어느 왕에게 가서 내 얘기를 할지도 몰라. 확신하건데 분명 선망이나 존경심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만약 그 상인에게 내 대신 이 왕궁에 눌러앉아 왕노릇을 해달라고 하면 그는 분명 몸서리를 치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걸?]
왕은 소리 내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정말 우스워서 웃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가 내게 아주 이상한 얘기를 하나 들려주었어. 3개의 바다 너머 아주 먼 땅에 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는 왕이 없다는 거야. 대신 몇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이 모두 모여 자기들 중에 한 명을 왕으로 뽑는다고 하더군.]
나는 술잔을 들다 말고 그대로 멈추고서 왕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확실히 왕은 취한 것이 분명했다. 백성들이 직접 왕을 뽑는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상인은 그저 어깨만 으쓱하더군. 마치 도리어 내게 한 왕의 자손이 대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것만 같았어. 혹은 내 백성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내가 왕으로 뽑힐 수 있을지 묻는 것 같기도 했어. 하긴,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얘기도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는 왕가의 혈통도 아니었고 심지어 나는 장자도 아니었잖은가. 왕의 혈통도 아니고 셋째인 내가 왕이 될 수 있다면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거겠지. 예를 들면, 자네라도 말이야.]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다며 호탕하게 웃어 넘겨야 할지 납작 엎드려 있지도 않은 죄를 고하며 용서를 빌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왕은 묵묵히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따랐다.
[아마도 그런 나라에서는 누가 왕이 되느냐가 아니라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겠지. 그래, 그게 아마도 모두의 숨통을 트여줄 거야. 그게 결국은 모두의 숨통을 조여 오겠지만.]
왕은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몇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의 손으로 직접 왕을 뽑다니,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미개한 일인가. 말하자면 키가 작고 허리가 굽은데다가 백치인 더벅머리 여자 노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건 키가 작아서, 허리가 굽어서, 백치여서, 더벅머리어서, 여자여서, 혹은 노비라는 이유만으로 왕에 뽑힐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왜냐고? 그걸 누가 알겠는가. 미련하고 미천한 백성들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는지 말이다. 그들은 수만 가지 다른 이유로 왕으로 세우고, 수만 가지 다른 이유로 왕을 비난하고, 수만 가지 다른 이유로 왕을 나몰라라 할 것이다. 심지어 왕 자신도 왕을 나몰라라 할 것이다. 과거 왕이 그저 존재하기 위해 필요했다면, 이제 왕은 그저 부재하기 위해 필요할 뿐이니까. 하지만 왕이 없다는 건 신이 없다는 뜻이다. 신이 없다는 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왕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대체 정의와 자비는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 그들은 서로를 제물로 삼기 위해 만인이 만인과 싸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만인 앞에 제물로 바쳐야만 할 것이다. 오직 어린애 같은 치기와 자학만이 국가의 미덕이 될 것이다. 이 뻔하디 뻔한 일들을 그 어리석은 나라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어리석음을 증오하네. 어리석음을 경멸하고 혐오해. 그래서 늘 미신을 몰아내려고 애써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그 믿음에 기반한 몽매한 이치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혹여 내 자신도 미신의 하나인 게 아닐까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네. 언젠가 내가 혼신을 다해 물리친 미신들과 함께 나 자신마저도 사라져버릴까봐 무서워.]
왕은 술을 단번에 들이키더니 마치 술잔이 비어있는 게 이상하다는 듯 빈 술잔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어쩌면 백성들은 뽑을 수만 있다면 장영실을 왕으로 뽑을지도 모르지.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뽑을지도 모르고, 혹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언젠가는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말이야.]
별안간 왕이 빈 술잔을 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는 바람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치 방금 어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하지만 확실히 알아두게. 지금은 내가 바로 왕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장영실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네가 아니라, 바로 내가 말이네. 난 누구에게도 왕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이 없어. 나는 한 번 제대로 왕노릇을 해보려는 참이니까.]
나는 안심했다. 언젠가 왕은 장영실을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장영실이 너무 커지거나 혹은 너무 작아지면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은 그저 왕이었다. 그도 결국 우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자네에게만 살짝 비밀을 알려줄까?]
별안간 왕이 바짝 내게 다가서며 목소리를 죽였다. 나는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제 곧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네. 오직 왕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아니, 오직 왕인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야. 확신하건데 그건 왕보다 더 높이, 왕보다 더 멀리 갈거야. 나는 그렇게 왕이 되고 그렇게 왕을 버릴 생각이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에 순종하면서 그 모든 것을 배반할 생각이야.]
왕은 크득크득 웃으며 들고 있던 술잔을 내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술이 내 옷자락 위로 넘쳐흘렀다.
[나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겠네. 그 술잔은 결코 마르거나 닳지 않을 거야. 늘 이렇게 맑은 술로 넘쳐 날거야. 모든 사람들이 실컷 마시고도 남을 만큼. 매일이 축제와 같을 만큼. 어디서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겠지. 누구나 술에 취하고 또 누구나 술에서 깨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 줄까. 모든 왕들을 용서해 줄까. 좋은 왕들뿐만 아니라 나쁜 왕들 까지도? 그래, 그럼 그제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왕을 뽑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래, 아주 먼 훗날, 언젠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지. 나는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세상. 아하, 대체 뭘 만들 생각이냐고? 그건 비밀일세.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어. 하지만 약속하지. 언젠가 그것이 완성되면 내가 자네에게 편지를 쓰도록 함세. 자네가 그 비밀을 한 자 한 자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아니, 자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야. 누구나 그 비밀을 큰 소리로 읽을 수 있도록 말이네.]
왕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결국 비밀이 있다는 사실이 비밀이라니, 그는 정말 취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자네는 나를 얕보고 있지.]
나는 술잔을 들다 말고 왕을 바라보았다. 하얀 술잔에서 넘친 술이 내 손가락을 적셨지만 나는 그대로 듣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자네가 늘 나를 얕보고 있다는 걸. 자네 아버지가 사실상 내 할아버지를 왕으로 만든 당사자니까.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더라면 자네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자네가 바로 지금 내 자리에 앉아 있었을 텐데. 그럼 자네는 어떤 왕이 되었을까? 물론 가끔 상상해 보았겠지? 어쩌면 매일일지도? 자네가 왕이었다면 했을 그 많은 일들, 그 위대한 일들,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내려놓고 옷자락에 손을 닦았다.
[그래서 난 지금도 자네가 내 친구라고 생각해.]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얼마 안가 나는 먼 지방 끝으로 좌천되었다. 왕은 언제나 나의 권력을 경계하고 나의 야심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오자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가 나를 내친 진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날 밤 내게 너무 많은 얘기를 했다. 그러니 나를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한밤중에 혼자 술잔을 기울일 때면 그날 밤을 떠올리곤 한다. 대체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날 밤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는 왕도 아니었고, 내가 알던 친구도 아니었고, 이곳 이 시대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온 우주를 헤매고 다니는 한 명의 인간. 바로 술에 취한 인간. 그리고 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인간. 어쨌거나 나는 지금도 매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비밀이 담긴 편지가 도착하기를 말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그것에 반대하는 상소를 쓰겠지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