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를 조금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약간의 편법을 써보자는 거지.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그는 나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지. 내 환심을 사고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조종하려고 해. 어쩌면 속으로는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막상 대면해보니 왕도 다른 작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조선을, 이 시대를 깔볼 수도 있겠지. 나도 알아. 그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의 존재 자체가 반동이라는 걸. 그의 발자취에서 의심스러운 질문들과 영감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걸. 그가 만들어내는 그 정교하고도 잡다한, 사실 외국에서는 이미 구닥다리에 불과한 물건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가 만든 가장 놀라운 발명품이라는 걸. 이런, 자네 얼굴에 근심이 가득 하구만. 걱정할 것 없네. 좀 더 여유를 가지도록 해. 내가 장담하건데 어차피 이런 흥취는 오래 가지 못할 테니까. 결국 나는 지겨워질 테고, 결국 그는 우리 중의 한 명이 되고 말겠지. 두고 보라고.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 순응하게 될 테니까. 꿈속에서 꾸었던 꿈같은 건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당장 손 안에 움켜쥔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게 될 거야.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게 되고 그 운명이 결국 이루어졌다고 자만하게 되겠지. 하하, 나는 벌써 이 술을 그에게 세 병이나 보냈는걸. 최고급 찹쌀과 최고급 꿀로 최고의 장인이 두 달이나 걸려서 만든 이 술을 말이야. 그는 혀를 내두르더군. 그의 눈빛이 탁해지는 걸 나는 보았네. 결국 그는 취하게 될 거야. 그리고 자빠져서 잠이나 자겠지. 두고 봐. 결국 자네들도 그를 좋아하게 될 걸.]
왕은 웃음을 터트리다가 그만 술잔을 엎었다. 감미로운 향기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최고급 찹쌀과 최고급 꿀로 최고의 장인이 두 달이나 걸려서 만든 그 술 말이다. 이 술을 한 번 마신 자는 결코 이 술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향기에 취해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된다고 한다.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맴돌며 퍼져나가는 독한 술 향기 때문에 등불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커다란 방 전체에 짙은 그림자가 울렁거리고 사방이 온통 창호지문으로 둘러싸인 방 바깥은 끝없는 어둠과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마치 이 세상에 왕과 나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왕과 나 단 둘만 남는다면 그는 여전히 왕일까.
[나도 예전에는 꿈이 있었지. 단지 성군이니 종묘사직의 보존 같은 게 아니라, 분명 그 이상의 더 중요하고 당연한 뭔가가 있었어. 꿈이라기보다는 예감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이 세상이 아니라면 과거에, 과거가 아니라면 미래에, 10년 뒤가 아니라면 100년 뒤에, 100년 뒤가 아니라면 1000년 뒤에,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 어떤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그런 직감 말이야. 한때 난 그걸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 그런데 지금 우리 꼴을 좀 봐. 고작 장영실 하나 가지고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세상에, 고작 재주 있는 인간 하나 요긴하게 쓰는 게 이렇게나 어렵고 힘든 일일 수가 있는가.]
왕은 내 잔에 가득히 술을 부어주면서 쏘아붙였다.
[장영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데.]
나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술잔 속에 담긴 술을 들여다보았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술잔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술이 천천히 맴을 돌았다. 나는 그 술잔이 한 없이 깊어지는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하늘과 땅이 뒤집어 지고, 조선이 들어서고, 왕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지금을 태평성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이토록 평화로운 시절은 다시 없었다. 그런데, 벌써, 그것도, 지겨워지고 있었다. 왕은 조심스럽게 술을 들이키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 생각을 캐내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네와 나는 동무였지. 늘 함께 어울려 다녔고 서로에게 하지 못할 말이 없었어. 심지어 우리는 내 할아버지를 같이 험담하기도 했었어. 그의 어리석음과 비겁함, 그리고 나약함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침을 삼켰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그의 할아버지가 왕이 될 줄 알았다면, 그리고 그 역시 왕이 될 줄 알았다면, 결코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는 퇴락한 장수의 후손으로 우리 가문보다도 미천한 집안이었다.
[이제 나는 친구가 없네.]
왕은 술상 옆에서 새 술병을 꺼내며 말했다. 4병 째였다.
[왕에게 친구가 있을 리 없지. 반상의 법도라는 게 그래.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거든. 하지만 왕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지 않나.]
왕은 자신의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나는 왕을 말려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왕은 놀랍게도 그리 취한 것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왕이 된 뒤로 자네는 더 이상 내게 반말을 하지 않았지. 내가 왕이 된 후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도 없었어. 그 때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았네. 자네도 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어떻게 그게 당연할 수 있지? 자네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됐단 말인가.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수 있겠냔 말이야. 할아버지는 알았을까? 자신이 자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는 자손들을 영원히 외톨이로 만들어버린 거야.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혼자 남겨지는 외톨이 말이야. 이 넓고도 좁은 왕궁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 내가 무슨 나병 환자나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들 나를 섬기는 척하지만 실은 나를 사육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돌아다니는 용상일 뿐, 인격이 없는 빈껍데기가 아닌가 말이야. 내가 장담하지. 할아버지의 자손들은, 내 자손들은, 결국 망가지고야 말거야. 나병 환자가 되고, 괴물이 되고, 살인자가 되고, 미치광이가 되고, 도망자가 되어서, 결국 그렇게 살해되고, 추방되고, 무시되고, 사라지고, 결국 영원히 잊혀지게 될 거야.]
지금 왕은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왕의 외로움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으며 알아서도 안되었다. 왕은 신이다. 그리고 사물이다. 자신의 말대로 인격이 없는 빈껍데기다. 그래서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왕은 존재하려고 한다. 자신을 존재로 가득 채우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대체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는 신이 어디에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앞에서부터 자신의 뒤로 길게 이어져 있는, 시공간을 넘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길고 긴 계보의 일환으로서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무시하고 싶어 한다. 그 계보만이 실존하는 것이고 신성한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라는 걸 무시하고 싶어 한다. 그의 인격이라는 것도 실은 계보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붉은 피 위로 퍼렇게 맺힌 멍일 뿐이라는 걸 무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고로 종묘사직이란 모든 왕을 합친 것보다 크기 마련이다. 설사 그 중 하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왕이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저 그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인정해야 한다.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그것은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아마도 광인에게나 가능하려나. 아, 혹시 그래서 왕은 장영실이 필요했던 걸까. 자기 대신에 자신의 신성을 모독하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이 장영실이 되기 위해? 나는 속이 부대껴서 단풍나무 잎사귀 모양의 과자 하나를 집어먹었다. 알싸하게 올라오는 생강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자네, 그거 아나? 이 왕궁에는 이런 방이 수백 개가 있고, 그 방은 모두 이미 죽은 왕들과 앞으로 죽을 왕들로 하나씩 채워져 있지. 그들은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옆방에 누가 있는 지도 모른 채, 홀로 끝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언제까지나 앉아 있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힐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3개의 등잔불이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지만 방 밖은 온통 까마득했다. 나는 아까 복도에서 보았던 수많은 문들이 생각났다. 혹시 그 방마다 누군가 홀로 앉아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들을 무심코 지나쳐온 것일까. 어쩌면 먼 훗날 어느 날 밤, 왕이 다시 나를 이 방으로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이 등불들마저 모두 꺼지고 그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있겠지. 그럼 나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어깨를 떨었지만 왕은 태평하게 나비 모양의 과자를 집어서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왕의 입에서 달콤한 모과향이 흘러나왔다.
[지금 나에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인들뿐이야.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자 훌륭한 말벗들이지. 낮에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지만 밤이 되면 그들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 없어. 그들의 독한 분 냄새에 취하면 잠자리가 편안해 지니까. 꿈을 꿀 수가 없거든. 최선을 다해 곱게 치장한 고상한 여인들이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지. 아마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왕이 되고 싶어질 거야. 그렇지만 방심은 말아야 해. 이 정숙한 여인들도 각자 자신만의 속셈이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 왕에게 속셈이 있듯이 말이야. 애틋한 여인과 한 이불 속에 붙어 누워서도 우리 사이에는 누군가의 빈자리가 버젓이 있는 셈이지.]
왕은 목마른 사람처럼 연거푸 술을 들이키고는 입술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서 어린 시절 왕의 장난기 있던 인상을 얼핏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