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취중담 (1)

by 곡도





나는 앞서서 걷고 있는 내관의 손에 들린 등불 불빛을 따라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궁궐 전체가 텅 빈 것만 같았다.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궁궐이 어떻게 이렇게나 적막한지 모를 일이었다. 단단한 나무 바닥 위를 사근사근 지나가는 내관의 발자국 소리와 다소 경솔하고 무뚝뚝한 나의 발자국 소리만이 흔들리는 불빛 그림자를 타고 들려올 뿐이었다. 복도 양쪽으로는 하얀색 창호지를 바른 똑같은 모양의 적갈색 미닫이문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창호지 문 너머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어떤 불빛이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문들 모두가 가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을 열면 벽으로 막혀있거나 또 다른 복도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나는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돌고 있거나 가장 먼 길로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내 뒤로는 지나온 길들이 차례로 없어지고 내 앞에서는 새로운 길들이 계속 생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문제는 과연 이 미로가 침입을 막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탈출을 막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벌써 한참을 걸었는데도 내관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나머지 급기야 어지럼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다 내관이 돌연 멈추어 서서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내관은 왼쪽에 있는 문을 향해 돌아서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창호지 문들 중 하나였다. 다른 문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하, 대감을 모셔왔습니다.]

내관이 캄캄한 창호지 문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음성이 들렸다. 내관은 등불을 옆으로 내려놓고 두 손으로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널찍한 방 안쪽에 왕이 있었다. 그는 여염집 사내처럼 편한 차림으로 술상을 앞에 놓고 푸른색 비단 방석 위에 홀로 앉아있었다. 술상 주위에 놓인 작은 등잔불 세 개가 왕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밖에서는 전혀 불빛이 보이지 않았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복도에서 보았던 그 수많은 문 뒤에도 모두 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방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으세요.]

머리를 조아린 내게 왕이 격식 없이 자리를 권했다. 나는 술상 건너편에 놓인 초록색 비단 방석 위에 앉았다. 왕과 이렇게 가깝게 대면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왕은 이미 술 한 병을 모두 비우고 새 술병의 술을 백옥으로 만든 자그마한 잔에 따르고 있었다. 술은 등잔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어느새 나를 안내했던 내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에는 왕과 나 단 둘만이 남았다. 왕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른 뒤 내 잔에도 따라주었다.

[이렇게 한 밤중에 불러내어 미안합니다. 혼자 술을 마시다 보니 적적하기도 하고, 또 대감 생각도 나고 해서요.]

왕은 자신의 잔에 있는 술을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나도 술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적셨다. 찹쌀과 꿀 향기가 진하게 감도는 술이었다.

[대감과 나는 어렸을 때 가까운 동무였지요. 할아버지가 왕이 되기 전에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서로 반말을 하며 자주 어울려 다니곤 했지요.]

왕은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오늘 그 때처럼 대감에게 반말을 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 방 안에는 나와 대감뿐인 걸요.]

왕은 웃음을 지으며 술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나도 잔을 들고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정말 이 방안에 왕과 나 단 둘만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자네가 올린 그 길고 빼곡한 상소는 잘 보았네. 자네는 정말 명문가야. 조목조목 예리하게 지적해 놓았더군. 나도 그 문제로 조정이 시끄럽다는 건 알고 있어. 아주 들끓고 있는 모양이던데. 장영실 때문에 말이야.]

왕은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는 먹기 아까울 만큼 아름답게 빚어놓은 붉은 꽃전 하나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자네들 말이 옳네.]

왕은 입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장영실은 야망이 큰 자야.]

왕은 말끝에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오만하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만해. 얼마나 오만한지 안다면 모두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 걸. 그는 재능과 능력으로 치자면 자신이 왕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아, 그렇게 놀라지는 말아. 그가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으니까. 아니, 그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에 대해 그 자신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거든. 그가 생각하려고만 했다면 분명히 생각해 냈을 어떤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뭐, 설사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뭐가 그리 큰 대수겠나? 이토록 견고하고 높은 신분의 벽을 그가 무슨 재주로 뛰어넘을 수 있겠어? 이 조선에서는 역모도 오직 양반들만이 가능한 것을.]

왕은 술을 들이켰고 나도 재빨리 한 잔을 비웠다. 듣고 있자니 목이 말랐다.

[조선이란 나라가 반상의 법도 위에 세워졌다는 건 자명한 일이지. 나는 언제나 그것이 못마땅했지만, 나도 알고 있어. 그 법이 유일하게 나를 지켜주는 무기라는 걸. 지금은 그 꼭대기에서 으쓱대며 함부로 조소를 날리지만 그 토대가 무너지면 나부터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내리겠지.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가끔 노비 신세나 내 신세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드네. 노비는 가장 밑바닥에서 이 모든 무게에 깔려 신음해야 하고, 나는 더 이상 디딜 곳이 없는 가장 뾰족한 꼭대기에서 어지럼증 때문에 신음해야 하지. 자네도 그런 적이 있지 않나? 양반이라는 게, 조선이라는 게, 아니, 내 발바닥이 이 조선 땅 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마저도 지긋지긋한 때가 말이야. 한겨울 추운 아침에 손이 새까맣게 얼어 터진 노비가 발을 동동거리며 떠다준 따듯한 물에 세수를 하려고 치렁치렁한 소매를 걷어 올리다 말고 문득 이 모든 게 다 뭐하는 짓거리인가 토악질이 날 때가 있지 않느냔 말이야.]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는 대답대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은 명주실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노비들은 이토록 향기로운 술을 평생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말이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네. 아주 중요한 거, 아주 본질적인 거, 아주 단순한 거 말이야.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확신이 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결국 죽을 때까지도 난 그걸 알아낼 수 없겠지. 그게 점점 더 내 숨통을 조여와.]

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기 때문에 나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사 알아들었다고 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술잔을 들고 단번에 술을 입 안으로 넘기더니 다시 정신을 차린 것처럼 활기를 되찾고는 두툼한 편육 두 점을 새우젓에 찍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쨌거나 난 장영실이 마음에 드네. 그의 야망, 그의 오만, 그래, 그의 간사함까지 말이야. 하지만 그가 노리는 건 신분 상승 따위가 아니야. 설사 자네들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 그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려하고 살지 않아도 되는 인생을 살려하네. 그는 뛰어 넘을 수 없는 시대를 정면으로 관통해서 그 너머까지 가려고 해. 그가 읍소하는 건 눈앞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지. 그게 바로 자네들을 화나게 하는 거겠지만. 그는 자신이 잘못된 때에 잘못된 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어. 아니, 태어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갑자기 이곳으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사실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잘못된 때에 잘못된 곳에서 돌연 정신을 차리고 만거야. 자네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왕은 조금씩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조금씩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벌써 두 번째 술병의 술도 떨어지고 왕은 세 번째 술병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다. 나도 조금씩 취기가 올라왔다. 꿀의 톡 쏘는 향기가 콧속에 가득 차서 숨이 막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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