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탄에 잠긴 그리스도

알브레히트 뒤러

by 곡도
SE-d073d90a-bd2e-4e8c-b188-a5921d94fccf (1).jpg

비탄에 잠긴 그리스도 Christ as the Man of Sorrows (1493) by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어둠.


눈을 뜬다.


어둠.


생각한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른 채.


만져본다.


벌거벗은 몸. 피. 그리고


머리 위에 씌워진 면류관.


그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떠올린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그는 크게 숨을 내쉰다.


심호흡? 혹은 한숨?


그는 죽기를 바라지 않은 것만큼이나


부활을 바란 적도 없다.


그래도 그는 일어나야 한다.


무덤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그러나 그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있기에는 너무 울적하고


살아있기에는 너무 피로하다.


무엇보다 그는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기에


다소 시큰둥하다.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건지.


날이 밝아 온다.


그는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다.


그는 크게 숨을 내쉰다.


심호흡? 혹은 한숨?


그는 우리를 바라본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부활을 거부하고 있는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V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