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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18. 2024

연극, 틈새, 실존




     이제 코로나도 지나가고 (사실상 코로나라는 이슈가 지나간 것이지만) 2024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연극계도 다시 활기를 띄는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벌써 4편의 연극을 예매하면서 개인적으로 체감하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그 기운에 힘입어 연극에 대한 내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실존'이라는 개념은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닳고 닳았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이 단어를 여기저기서 접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표현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우리는 실존할 수 있으며 실존해야 한다고, 현대인들은 매 순간마다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나는 실존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인간은 결코 실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지식인들이 꿈꾸는 자아 과잉적인 이상적 자기 초상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저 초인주의의 좌파식 변종에 불과하다. 실존이란 노력하고 성취해야 하는 자기실현이 아니며 일부 뛰어난 인간만이 완수할 수 있는 어떤 경지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생에 단 한 번, 삶의 마지막 죽음의 찰나에 딱 한 번쯤 실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니, 그런 순간일수록 더더욱 결코 자신의 실존을 의식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순간 우리의 실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 '실존'이란 스스로 실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볼 때,  우리는 결국 실존할 수 없다. 실존은 결코 본질을 앞설 수 없다. 

     종종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실존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해서 정말 우리가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순간 정말 실존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명료하게 의식했다기보다, 그저 자신감이 찼다거나, 컨디션이 좋다거나, 흥이 올랐다 등의 기분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실존은 성찰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실존을 - 대부분 작위적으로 - 의식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다.  그러니 깨어있는 의식이니, 자유니, 책임이니, 사회 참여니, 실천이니, 연대니 하는 것들로 실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실존주의자들은 마치 사이비 전도사처럼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래, 그들의 의도와 동기가 선하다고 치자. 개인적으로 정작 그들의 의도와 동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더불어 결과의 선함은 과정의 선함을 담보하지만 의도와 동기의 선함은 과정의 선함을 전혀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신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그들의 선의를 믿어준다고 치자.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한 의도와 동기, 가치, 무엇보다 의지는 '실존'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실존'이란, 신과 함께 해체되어 버린 윤리와 휴머니즘, 이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다시 세우고 소시민들의 목적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고고한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선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결코 해낼 수 없는 그리고 동시에 결코 실패할 수도 없는 과제를 주고는 무지개 너머 어딘가로 그들을 영원히 영도하는 명예를 누린다. 신과 함께 우리의 기원과 근원의 근거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실존함으로 기원과 근원을 초월하여 서로를 (더) 사랑하고, 서로 (더) 연대하며, 스스로 (더) 주체성과 책임을 가지고, 동물이나 사물보다 (더) 자유롭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와, 아름답지만 역겨운 이야기. 

    인간은 실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실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나 이미 실존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자신의 실존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무엇보다 실존과 본질은 선후관계나  대립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실존하고 있는 본질이며 본질적으로 실존하고 있다.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이론적이고, 무엇보다 선동적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이 아닌, 인간을 재료로 작위적이고 초인적인 인간상을 창조하려고 하는 예술가-지식인의 야심과 교만일 뿐이다. 

   우리는 - 언제나 이미 영원히 - 실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반영, 일종의 예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멀리, 혹은 너무 가까이에서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마치 지구에게서 몇 백광년, 몇 천광년 떨어져 있는 별을 그것이 몇 백광년, 몇 천광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바라볼 때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무감각한 놀라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감하면서도 우리의 본질과 본성, 그리고 세상의 연속성 속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로써 부단히 생존하느라 정작 실존하면서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이러한 실존의 비실존적 특성은 실존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의 본질이다. 실존은  비실존적이기에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세상의 자전이 멈추고, 나의 심장이 멈추고, 시간이 멈추어야만 한다. 그것은 초현실적인 강제성, 인위성, 예외성을 요구한다. 멈출 수 없는 모든 흐름을 멈추고, 벌어지지 않는 틈을 벌려서, 작지만 강력한 진공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만들어 내는 힘. 그것은 삶의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인해 곧바로 다시 오그라들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겠지만 한편으로는 영원과 영원의 틈에서 이물질처럼 돋아나와 영원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찰나의 생명을 닮았다. 나는 연극을 그러한 단절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이라는 단절을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실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실존에 한 발 다가간다. 그러나 헷갈려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해서 실존에 다가가는 것은 관객이다. 배우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기 때문이다. 

    왜 모든 종교의 신은 죽는가. 부활하기 위해서? 맞다. 물론 그들은 부활한다. 부활해야 한다. 부활함으로써 그들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보장하고 보호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신의 죽음이 드러내는 이 세계의 실존이다. 신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원을 노출한다. 그것은 바로 '텅 빔'이다. 신의 없음, 세계의 없음, 인간의 없음. '공허' - 나는 국어에서 이 이상의 단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실 연극이란 특히 요즘같이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시대에는 효율이 한참 떨어지는 오락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앞 뒤로 돌려 보다가 언제라도 도중에 빠져나오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연극 관람은 다소 고역이다. 소위 실존주의적으로 실존하는 우리에게 그런 비주체적이고 무기력하며 불특정한 미상의 존재, 관객이 되라는 강요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왜 - 어떤 -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드는 걸까. 연극 공연을 보기 위해서? 아니, 공연은 그저 핑계이거나 부가적일 뿐이다. 극장은 무엇을 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무엇을 보지 않기 위한 곳이다.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이며, 연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어내기 위해서,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함이다. 물론 거기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긴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철저한 공허를 견딜 수 없으며 결코 철저하게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장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 예를 들면 신의 죽음과 부활의 드라마 같은 것. 

     무대 위의 배우는 신이다. 하지만 그는 멀고 위대한 이상적인 신이 아니라 제단으로 내려와 피를 흘리며 희생제물이 되는 신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다. 그는 무대 위에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죽는 순간에만 실존할 수 있는 우리를 죽음과 공허의 실존으로 산채로 밀어붙인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적 위기인 실존 자체로부터 우리를 다시 구원하기 위해 그는 부활한다. 혹은 우리는 실존의 위기인 실존 자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부터 강제로 부활시킨다. 그럼 부활한 그는 우리를 실존으로 밀어붙인 힘만큼 강력하게 우리를 다시 실존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의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실존적 운동이다.  

     최대한 실존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는 무대 주위로 바짝 모여들지만 충분히 거리를 둬야 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형태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텅 빔으로써 모든 게 우리를 통과하며 지나간다고 느낀다. 우리는 실존을 가장 억압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주체성과 책임과 자유와 인격과 참여를 박탈함으로써 아슬아슬하게 실존에 한 발 다가간다. 그래서 나는 관객의 주체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소위 '열린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의 신성한 연극이 아니라 그저 세속적인 관례가 되어버린 축제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연극은 지극히 오락적이며, 다시 말해 카타르시스적이다. 카타르시스로서의 연극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상현실의 실용마저 곧 가능해질, 온갖 방법으로 카타르시스가 넘쳐나는 오늘날 굳이 연극까지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나로서는 무언가를 섭취하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언가를 배설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극장에서 위와 장을 채우고 싶지 않은 것만큼이나 비우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말하자면 나는 아예 위와 장을 떼어버리고 싶은 것이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운동을 멈추고 싶은 것이며, 그 마저도 불가능하다면 모른 척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실존할 수 없는 것은, 실존의 본질이 공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실존하도록 하기 위해 실존이 비실존이 되면서 지키고 있는 성스러운 비밀이다. 연극은 그러한 실존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우리를 실존과 얼핏 접촉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존하거나 좀 더 실존할 수 있는 건 아니며, 실존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실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구태여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연극을 보러 가는가. 여기까지 이토록 길고 정성스럽게 나불거린 것이 무색하게도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한 번 막연히 짐작해 보건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익숙해지고 싶은 건지.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당장 자살하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계속 반복하는 안전한 자살 시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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