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니엄 (5)

by 곡도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저는 늘 혼자 있는 게 좋았습니다. 혼자 있으면 제 발밑에서부터 머리 위로 빛이 축축하게 스며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납작하고 평평하게 눌려있던 머리도, 눈도, 손끝도 물이 올라서 통통해지고 그 안으로 차오르는 피와 폐와 위도 한결 맑고 선명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풍경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고 생명은 더 이상 애완이 아니며 사물은 더 이상 소품이 아니었죠.

아, 제 말을 의심하시는 군요. 마치 경기에 패배한 선수가 목을 잔뜩 움츠리고서 “난 이기는 것 보다 지는 게 더 좋아. 그럼 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라고 짐짓 중얼거리듯이, 이 모든 게 외톨이의 자조적인 위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저도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쩌면 무의식이니 잠재의식이니 하는 그 어떤 어딘가에서는 정말로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저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은 타인에게 만큼이나 저 자신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죠. 그러니 저는 그저 여러분에게 제 진심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진실이 아니라요.

심지어 저는 그 흔하디흔한 개나 고양이조차 키우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개나 고양이 같은 건 딱 질색이에요. 손 끝 하나 대고 싶지 않아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것들. 인간보다 더 감상적인 것들. 사람에게 의지하는 척 하면서 사람의 혼을 갉아 먹는 것들. 특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유일함을 강요하는 것들. 그 끈질긴 기다림과 집요한 눈동자. 사람들은 그것들의 삶을, 그것들은 사람들의 삶을 뜯어먹으며 함께 거짓 포만감을 느끼죠. 정말 끔찍해요. 우리에게 고통과 회한이 부족한가요? 굳이 과민한 애정에 길들여져야 해요? 언어의 경계에 부딪혀 다시 단단한 언어의 바닥으로 나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사람답기를 요구합니다. 사람을 상대로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우리의 과도한 인격은 모두 그들에게서 배운 거예요. 짐승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들의 뱃속으로 기어들어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건 수간보다 더 병적이에요. 결국 인간을, 삶을, 죽음을 혐오하게 됩니다. 저는 모든 애완동물과 반려동물과 동물원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길들인다’는 단어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동물들과 인간이 서로를 오염시키는 짓을 멈추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더 냉담해지고 더 슬퍼지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에게처럼 동물들에게도 영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헛된 바램이겠죠. 사람들은 잠시라도 혼자가 되는 것을, 그래서 원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그래서 온전히 온전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니까요. 저도 그 두려움이 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홀로 비루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뿐이에요.

이런. 이건 마치 고해성사 같네요. 왜 미세하게나마 죄의식이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제게 죄의식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저를 놀라게 하네요.) 제가 지나치게 교만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지나치게 겸손하기 때문일까요? 혼자가 된다는 건 어느 쪽으로든 지나친 문제인가요? 아니, 어쩌면 제가 이제껏 진정한 의미에서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두요. 이 보다 더 혼자일 수는 없는 데도 말입니다.

혼자인 순간에도 저는 더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책을 읽습니다. 독서는 혼자 있는 가운데 더 혼자가 되는 최선의 방법이지요. 더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책을 펼치면 세계 전체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 없이 바닥으로 흩어져 내립니다. 텅 비어버린 너른 여백이 머리 위로 드높아집니다. 한없는 이 세상이 아주 작고 조용한 빈 방처럼 고즈넉해져요. 그리고 텍스트만이 시시각각 지나가는 그림자를 실내에 드리웁니다. 텍스트는 햇빛-창이라고 해야 할까요. 햇빛이 있어서 창이고, 창이 있어서 햇빛이죠. 태양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 빈 방에서 혼자 깨어나고 혼자 잠드는 하루하루가 저는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이 , 쓸데없는 얘기가 또 구구절절 길어졌네요. 잠시 오래된 회상에 빠졌었나 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그러니까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이 정도는 되어야 엘리니엄을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지불 능력, 선천적 기질, 삶의 방식에서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하죠. 하지만 앞서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자격’이란 결코 특권이 아니며 능력이나 인격, 의지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적합도일 뿐이에요. 마치 사이코페스를 평가하는 테스트처럼, 합격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결함에 대해 전전긍긍해야 할 판이죠. 그러니 이 테스트에 떨어졌다고 해서 결코 낙담할 필요 없습니다. 반대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엘리니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엘리니엄은 지옥이 될테니까요. 그것도 영원한 지옥이요. 제 말을 믿으세요. 언젠가는 저에게도 지옥이 될지 모릅니다. 결국에는요.

그럼 저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해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엘리니엄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네, 우선 가장 처음, 최초의 시작이 알고 싶으시겠죠? 엘리니엄과 딱 맞닥뜨린 첫인상 말입니다. 그래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니, 사실 기억이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겠네요. 진정한 의미에서는 ‘기록’이라고 해야겠지요. ‘기억’은 점차 빛이 바래지만 ‘기록’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까요. 기억과 기록의 차이야 말로 엘리니엄 이전의 삶과 엘리니엄 이후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엘리니엄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됩니다. 너무나 선명해서 언제든지 정확하게 꺼내볼 수 있죠. 잊어버릴 염려가 없어요. 반대로 속세에서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마치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뜬소문처럼 모호합니다. 주어와 목적어가 마음대로 자리를 뒤바꾸는 그런 뜬소문이죠. 때로는 그런 것들이 그립기도 합니다. ‘뉘앙스’라든지 ‘어감’이라든지 ‘음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요. 엘리니엄에는 그림자가 없거든요. 가시적인 그림자마저도 이곳에서는 너무나 독립적이고 개별적입니다. 마치 ‘빛’이라는 글자 옆에 나란히 써놓은 ‘그림자’라는 단어처럼요. 그건 그림자가 아니죠. ‘빛’의 그림자는 ‘빛’이어야 하잖아요.

자아, 그럼 한 번 볼까요. 엘리니엄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리고 나면 눈앞에, 그러니까 눈-앞에, 아, 이런, 잠깐만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여러분에게 글을 쓰는 제 입장에 대해, 그러니까 글을 읽는 여러분의 입장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서 ‘기억’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구구절절 늘어졌던 것과 같은 일들이 계속 되풀이 되고 말테니까요. 단어 마디마디마다 걸려 넘어져서 한 발자국도 제대로 내디딜 수 없을 거예요.

여러분이 제 글을 읽으실 때 반드시 명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니엄에 대해 제가 하는 모든 얘기는 순전히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내용뿐만 아니라 제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그렇습니다. 저는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는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은유마저 무언가의 은유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제 자신마저도 은유에 불과합니다. 이건 인식론이나 존재론 같은 철학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실존적이고 실전적인 현실의 문제지요. 그리고 저의 그 현실에서는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본체와 기능, 육체와 영혼, 진실과 거짓, 질문과 답 등등의 모든 게 다 전도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언어는 스스로 전도되지요.

예를 들면 저에게는 사실상 ‘눈’이라는 게 없습니다. 시점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앞서 사용했던 ‘눈이 번쩍 뜨이다’라는 표현도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도 부지불식간에 쓰게 될 이런 부정확하고 관용적인 표현들에 대해 여러분께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고 특히 언어란 체내적인 것이어서 표현 하나하나를 검열하며 글을 쓴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일이죠. 아니, 애초에 세계를 구성하는 감각 자체가 다른 여러분과 제가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 말로 부당하고 무모합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나’라든지 ‘엄지손가락’ 이라든지 ‘한숨’이라든지, ‘빛’이나 ‘무게’, ‘소리’, 혹은 ‘하얀색’, ‘고요’, ‘슬픔’ 이라는 단어까지도 일일이 교체하거나 재정립해야하죠. 하지만 그러고도 오해는 해소되지 않아요. 오해를 오해로 푸는 격이에요. 거짓이 없는 거짓이구요. 그건 분명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일입니다. 부조리를 희화화시키니까요. 하지만 단 하나의 공감도 기대할 수 없는 철저히 주관적인 체험을 공공의 언어로 전달해야하는 제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신다면 그냥 되는대로 쓰도록 허락해 주세요. 마치 제가 여전히 인간인 것처럼 제 흥에 취해 기분을 내는 걸 모른 척 해 주십시오. 다만 저에게 정말로 속아 넘어가지는 않기를 신신당부 드립니다. 말하자면 여러분도 저 만큼이나 부도덕하고 기만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뭐 어차피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는 이미 이골이 났잖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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