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갑자기 눈이 번쩍 뜨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다가 뜬 게 아닙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니구요.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간 것도 아닙니다. 꺼져 있는 컴퓨터가 검은색 화면을 켜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요. 누군가 전원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딱 눈앞이 밝고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얀색 방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m인, 1000세제곱미터가 되는 정육면체 방에요.
저는 그 방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선 채로 정신이 든 것이죠. 순간 어지럽거나 무릎이 꺾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방을 보고 있었어요. 온전히 – 이 단어를 쓰는 게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 제 자신으로요. 그러니까 제 자신인 제 자신으로 말입니다. 무언가 끊어졌거나, 어긋났거나, 틈이 벌어졌거나, 비어있거나, 모자라거나, 넘친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의심스러운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물론 지금껏 – 100년이 지나도록 - 의심이 제 머릿속을 떠난 적도 없습니다만.
임종의 순간 저는 늙고 병들어, 소위 죽을 힘조차 없을 만큼 끔찍하게 지쳐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각종 기계에 연결된 채 수시로 얼굴을 들이미는 의료진들과 연구진들에게 바짝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뇌가 최후의 뉴런들을 태워대며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와 기억과 소란들로 인해 모든 신경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눈을 떴을 때 방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에 저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공백. 그것이 바로 엘리니엄의 첫 인상이었습니다.
엘리니엄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혹시 제 임종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죽음을 경험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니까요. 뭘 보았거나 들은 게 있는 지, 혹시 사후 체험 같은 것은 없었는지 말이죠. 죄송하지만, 아무 것도요. 고전이라고 할 만한 빛의 동굴이니, 유체 이탈이니, 신비한 안내자니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전기가 나가버리듯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어중간한 중간쯤에서요. 미처 죽음을 경험해 보기도 전에 그만 죽어버리고 만 것이죠. 죽음은 우리 뒤를 바짝 따라오다가 정작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를 앞지르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결코 죽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과 우리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어서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그 간극 속으로 떨어져 내립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애초에 실재하지 않으며, 실재한다 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하긴 저야 사망 판정이 나자마자 엘리니엄으로 다운로드 되었으니 제가 정말 죽었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니면 저는 정말 죽어버린 걸까요? 화장되어버린 육체에 제 일부가 남아있었거나 어쩌면 전체가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살아생전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혀 다른 무엇인지도 모른다구요. 나는 진짜 나일까. 나라면 어디까지의 나일까. 과연 ‘다운로드’와 ‘복사-붙여넣기 후 원본 삭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 숨이 넘어가기 직전, 제 질문을 받은 담당 연구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속삭였습니다. 자신도 모른다구요. 물론 그렇겠죠. 산모도 자기 뱃속의 아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래도 아이를 낳고야 말지요.
그렇게 아이들은 살아갑니다. 아무런 찬성도 반대도 없이.
저는 여기서 그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늘어놓지는 않겠습니다. 이 문제가 전혀 성가시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저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제 이름 같은 건 더 이상 아무 상관없다고 말씀드렸었죠. 여러분에게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자아, 딴 소리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어요. 아니, 어쩌면 제가 짐짓 먼 길로 돌아가고 있나요. 일부러 발을 질질 끌면서요.
그럼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뜨입니다. 저는 하얀 방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m인, 1000세제곱미터가 되는 정육면체의 방입니다. 잠시 텅 빈 방을 둘러보고 있자니 한 쪽 벽에 동영상이 나타납니다. 엘리니엄 사용 설명서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미 사망하기 전에 여러 번 보아두었지만 찬찬히 다시 봅니다. 심지어 아무 쓸데없이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그 시간 낭비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서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제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그래요. 엘리니엄의 ‘시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우선 이론적으로, 엘리니엄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의 삶도 영원하다는 뜻이지요. 인류가 생존하는 한, 그래서 엘리니엄이 가동하는 한, 저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영원한 삶이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네요. 솔직히 저도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고에서는 고작 만년 정도가 사실상 ‘영원’이 아닌가요. 인류의 역사도 아직 만 년이 되지 않았잖아요. 짐작컨대 저도 한 1000년 정도까지는 엘리니엄에서 질리지 않고 거뜬히 살 자신이 있습니다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2000년, 3000년, 4000년, 그리고 만 년 후에는요? 그리고 그 이후에는요? 세상에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육체가 없는 저는 이론적으로는 늙지 않지만 어쩌면 그때쯤 저의 정신과 기상은 늙어 꼬부라져서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거나 혹은 여러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구요. 어쩌면 모든 게 닳고 닳아 흐물흐물한 민달팽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찌 알겠습니까. 뭐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결국에는요.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아, ‘시간이 충분하다’는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걸 이해해 주세요. 저에게는 이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을 거라는 염려와 조바심 때문이에요. 인간이란 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들이죠. 우리는 평생토록 머릿속에서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시계와 달리 그것은 결코 같은 숫자로 돌아오지 않는 일방향의 초침이에요. 치밀하게 전진하는 초침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함께 우리의 시간은 자를 댄 듯 눈금으로 쪼개어지고 그 눈금 위에 그려진 그래프가 바로 우리의 삶이 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프의 모양은 제각각일지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정답을 도출한다는 걸요.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더 나쁜 건 정확히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어쩌면 가장 어이없고 부적절한 타이밍에 갑자기 – 사실상 언제나 그렇지만 -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죠. 있는 힘껏 달리다가 투명한 벽에 부딪혀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뛰고 있는 달리기 선수를 생각해 보세요.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긴장과 두려움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선고받은 그 부당함, 그 가당치 않은 당연함을요.
그러나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허둥지둥 떠밀려 가죠. 아니, 어느새 허둥지둥 밀치며 달려갑니다. 우리에게 조급증은 본능이자 혼이며 미덕이에요. 오늘은 뭘 해야 하고, 내일은 뭘 해야 하고, 한 달 후에는 뭘 해야 하고, 1년 후에는 뭘 해야 하고,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까지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죠. 아니, 이미 전시되어 있는 표준화된 계획들 중 하나에 동의한다는 편이 더 정확할까요. 심지어 낙오자라도 ‘사회 낙오자’라는 계획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어떤 역할이든, 어떤 계획이든,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려면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합니다. 늘 그 다음 시간을 가불해서 지금을 살아가야하는 처지에요. 그러니까 평생을 쫓기는 빚쟁이 신세인 거죠. 결국 거대한 빚더미가 영원히 우리를 삼켜버릴 때까지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고리대금은 또 없을 겁니다. 고작 최대 100년 정도를 빌려주고는 영원을 이자로 받아내지요.
그런데 돌연 무한한 시간이 여러분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한한 시간이요. 이 ‘무한’이라는 단어로 어떻게 ‘무한’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한’을 연달아 한 만 번쯤 쓰면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체감하게 될까요. 음,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 혹은 모레, 혹은 한 달 뒤, 심지어 1년 후나 10년 후, 100년 후에 해도 아무 상관없는 일상을 상상해보세요. 그 여유, 노동으로 치열하게 짜내야 하는 강박적인 여유가 아니라, 조급증과 조급증 사이에 짓눌린 시한부적인 여유가 아니라, 숨을 헐떡이는 끝없는 반복에서 야기되는 산소 부족의 마취 상태 같은 여유가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아무 상관없는 그런 진정한 여유말입니다. 그 해방감. 그 안도감. 그 자유로움. 존재가 형성하고 동시에 존재를 형성하던 필연적인 죄의식과 피행망상과의 단절.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짓누르던 과도한 중력의 정상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