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니엄 (7)

by 곡도




네, 저는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이야 말로 엘리니엄의 본질이자 지금 제 자신의 본질이라구요. 사실 ‘영원한 생명’이라거나 ‘불멸’이라거나 ‘불사’같은 건 지금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니, 아니죠. 아니에요. 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그 점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필멸이 예정되어 있었던 속세에서도 말이죠. 태어난 이후로 저는 언제나 지금에 살아있었고, 당장의 영원한 생명이요 불멸이요 불사였으며, 죽음은 끝까지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가정이었으니까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아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면서도, 그리고 자신의 노년을, 심지어 사후의 일 까지 치밀하게 계획하면서도, 자신이 정말 죽을 거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정말이라니까요.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 한 번 죽어본 제 말을 믿으세요. - 그러니 단순히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저에게 그렇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소 이론적으로 그리고 또 다소 감상적으로는, 순간과 영원이 마침내, 네, 마침내 완전한 하나의 전체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저를 벅차오르게 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비로소 내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것은 단지 죽지 않는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나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듭니다.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실존적인 것까지 모조리 싹 말입니다.

그래요. 영원한 삶을 가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가 다른 인간들보다 몇 백 년, 몇 천 년, 몇 만 년을 더 살았거나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이 순간이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가장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 사이에 공통점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이미 꽤나 위태로운지도요.

아, 혹시 여러분 중 어떤 분은 공허에 대해 떠올리고 계시나요? - 그나저나 ‘공허’라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단어네요. 엘리니엄에 들어온 뒤로 처음 떠올려봅니다. 그러고 보니 ‘공허’는 참 공허한 말이죠. ‘공허’는 공허로 빈틈없이 꽉 차있으니까요. - 죽음의 공허는 제거됐을지 모르지만 대신 삶이 공허로 가득 차게 될 거라고요. 죽음은 결국 유예된 공허일 뿐으로, 죽음이 사라지는 순간 역류한 불투명한 공허 속에서 죽지 않는 존재는 그만 유령처럼 투명해질 거라고 말입니다. 존재는 공허의 여백 속에서만이 존재자가 될 수 있으며, 존재자로서의 의식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태초까지 삶 전체로 전달되는 파동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죠.

네, 저도 동의합니다. 죽음의 파동으로 박동하는 존재자는 임의적이고 작위적인 현존의 세계로 홀린 듯이 달려갑니다. 영원히 균일한 공허 위로 떠오르는 물거품처럼, 규칙과 변칙과 반칙과 예외가 온갖 지형과 날씨를 만들어내는 세계죠. 그렇게 삶은 굽이굽이 이야기가 되고, 결말은 언제나 극적이며, 존재자는 높은 이마 위에 빛나는 인격을 걸친 주인공이 됩니다. 바로 여러분처럼요. 저런, 겸손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이 주인공인 건 사실이니까요. 황제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고 걸인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천치나 광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는 법이죠. 각자의 무수한 주인공들이 얼기설기 뒤엉키고 튀어 오르고 짓이겨지고 사그러들며 만들어내는 오만가지 무늬는 얼마나 아름답던가요. 마치 화려하고도 섬세한 불꽃놀이 같아요. 끝없는 우주를 배경으로 영원한 별빛마저 압도해버리는 그 찰나의 황홀함.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여러분 모두가 스타가 아닙니까.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요.

다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엘리니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엘리니엄에는 삶도 죽음도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무대도 주인공도 엑스트라도 없지요. 배경도 어둠도 빛도 없습니다. 사실 엘리니엄이란 관객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텅 비어있지요. 아, 그럼 관객인 저는 어디에 있느냐구요? 여러분, 전 관객이 아니에요. 제가 바로 관객석입니다.

과연 바늘처럼 뾰족한 세상의 꼭대기인 무대 위 빛나는 조명 속에서 웃고 노래하고 달리고 성내고 소리치던 주인공들이, 서로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던 배우들이, 분장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까지 싹 지워버리고서 다만 전능이면서 다만 불능인 시선이 될 수 있을까요? 웃음을 터트릴 입도, 눈물을 흘릴 눈도, 손뼉을 칠 손도, 발을 구를 다리도, 쾌락을 삼킬 성기도, 방구를 낄 항문도 없는 단지 시선 말입니다. 그래요, 말해보세요. 괜찮습니다. 그거야말로 철저한 타락이 아니냐구요? 네, 정말 맞습니다. 그거야말로 철저한 타락이지요. 영원히 철저하고 철저하게 영원한 타락.

그러니 여러분, 엘리니엄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계속 무대 위를 점령해 나가세요. 칼날 같은 삶과 칼자루 같은 죽음을 저글링처럼 가지고 노세요. 욕망의 공기를 마시고 분노의 대사를 새기십시오. 여러분이 사느냐 죽느냐를 외칠 때 100년 동안 수천 번 수만 번 같은 대사를 듣고 또 들었던 저는 그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말테지만 결국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결말에서마저 저는 또 한 번 감탄하며 두 손을 쥐어짤 것입니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 자칫 중요한 사실을 빠뜨릴 뻔 했네요. 1년이니 10년이니 100년이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 전에 엘리니엄의 시간 표준과 속도가, 속세의 시간 표준과 속도와 일치한다는 걸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요.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발언 순서가 뒤죽박죽이거나 자꾸 중언부언 하는 걸 이해해 주세요. 속세의 분별력과 맥락, 상관관계에 대한 저의 지각이 현저하게 낮아진 탓입니다. 게다가 속세와 엘리니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그리고 여러분께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글을 쓴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양쪽 세계의 시간 표준과 속도의 일치 여부는 정말이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니엄은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고 그를 통해 저는 모든 정보와 뉴스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으니까요. 실시간. 그것이 저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오로지 그것만이 저에게 실제적이고 인간적인 현실감을 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양쪽 세계의 시간 표준과 속도가 어긋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1년 내내 같은 날짜의 뉴스를 봐야 하거나 하루 동안 1년 사이의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면 말입니다. 아니, 1년이 아니라 단 하루, 혹은 단 1시간이라도 차이가 나면 우리의 예민한 신경은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최소한의 인격적인 균형마저 잃어버리고 붕괴하다가 결국 정신 분열이라도 일으키고 말걸요.

네, 이쯤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결국 저는 철저하게 혼자이기는 커녕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세계에, 여러분의 온라인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악착같이 매달려있는 셈이죠. 하지만 여러분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온라인은 우리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기관 중 하나라는 것을요. 아마 심장 정도에 빗댈 수 있을까요. 심장이 멈추면 뇌도 육체도 영혼도 그만 괴사되어버리고 말죠. 결코 과장이 아니에요.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컴퓨터가 더 이상 컴퓨터가 아니듯,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인간 역시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요.

엘리니엄 본사는 개발 초기부터 ‘실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엘리니엄 본사 측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속세의 시간과 엘리니엄의 시간을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건 기술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상 엘리니엄의 용량 대부분을 여기에 할당해야만 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바로 엘리니엄이, 그러니까 제가 있는 이 공간이 1000세제곱미터의 정육면체가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 속세와 같은 시간을 재현할 수 있는 엘리니엄 공간의 최적치가 1000세제곱미터거든요. 이 정육면체가 엘리니엄 시공간의 안정 및 현실화뿐만 아니라 감각의 실제화, 인식과 체험의 결속을 구현해내는 절대 단위인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 1000세제곱미터의 공간은 반드시 1000세제곱미터일 수밖에 없으며, 이 1000세제곱미터 안에서만이 저는 저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1000세제곱미터의 정육면체야말로 바로 저 자신이에요.

물론 여러분도 여러분의 세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사실상 세계와 여러분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나 구분도 없다는 것을요. 하나의 일체이기에 통합할 필요가 없고 분리될 수 없기에 구분할 필요가 없죠. 여러분의 자아란 드넓은 세계-자아에 우연히 찍힌 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점이 시점의 구심점이 되어 의식의 형상적인 현실을 구성하는 건 사실이에요. 구심점이 없는 존재, 존재자가 아닌 존재를 우리는 사물이나 유령이라고 부릅니다. 존재의 절대치는 똑같은 대도, 어째서인지 우리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죠. (뭐, 저로 말하자면 더 이상 유령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사물은 전보다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엘리니엄의 개념와 형성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나요? 대략이나마 말입니다. 이런 이런, 아직 부족한가요? 여전히 불분명해요? 이를 어쩐다. 그럼 이것만 기억해 두세요. 중요한 것은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진실공방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공공연히 확정짓는 일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나머지는 예외나 별건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죠.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들은 거기에 다 들어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엘레니엄의 본질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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