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삶’이란 지극히 그리고 또 온전히 ‘인간적인 육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정신적이지 않거든요. 우리가 정신에 부여한, 존재에 대한 모든 소유권과 선험권은 순전히 의도적으로 전복된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여러분이 받아들이셔야 할 것은, 물론 이미 너무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 피상적이 아니라 엄중하고 명명백백하게 인정하셔야 할 것은, 엘리에게는 육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에게는 육체가 없습니다. 엘리니엄에서는 인간의 육체 없이 인간의 삶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네, 당연하면서도 충격적이죠. - 엘리니엄에서는 모든 게 당연하면서도 충격적입니다. - 하지만 애초에 엘리니엄 구매자는 육체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었다는 걸 명심해 주세요. 그래야만 육체적 결핍에 실망하기 보다는 그나마 주어진 대안에 감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나마 주어진 대안’이란 게 뭐냐구요? 바로 ‘감각’입니다. 저에게는 감각이 있습니다. 이 감각이 육체의 부재를 어느 정도 보완해 줍니다. 하지만 감각이 육체를 완전히 대체해주지는 못하며, 또 대체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육체의 부재로 인한 위화감과 불안감, 저항감을 견딜 수 있고 또 익숙해질 수 있을 만큼만 약화시켜 줄 뿐이죠.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육체의 부재가 정신 작용을 방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이 감각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흠, 실감이 안되신다구요. 당연합니다. 육체의 일부분이 절단되거나 총이라도 맞아 본 경험이 없는 이상, 육체와 감각과 정신의 분리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죠.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려 볼까요.
(아, 원칙적으로는 ‘시각’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하는 게 맞지만 그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 대화의 기본 전제인 데다가 앞서서도 여러 번 언급이 되었고, 또 무엇보다 인간일 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까요. 속세에서처럼 엘리니엄에서도 시각이 존재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기둥삼아 세계를 밀어내구요.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뿜을 수 있죠. 이것이 시각장애인이 아닌 제가 시각에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다만 예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몸이 먼저 앞서고 시선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시선만이 앞선다는 정도일까요. 설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난해해질 뿐이니 이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평범하고 직접적인 것부터 말씀드리도록 하죠. 사소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자, 여러분. 저는 제 손을 볼 수 있습니다. 제 두 손 말이에요. - 아, 할 말이 많으시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세요.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지만 제 말부터 들어주십시오. -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타자를 치고 있는 제 두 손을 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라고 해야겠죠. 지문도 없고 손톱도 자라지 않는 손이긴 하지만, 게다가 마네킹 팔을 잘라서 만든 고무 의수처럼 손가락이 지나치게 길고 매끈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제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제 손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멀리까지 뻗어서 건너편 벽이나 천정을 짚고 온다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실제 사람의 손과 유사한 반경 안에서 움직이죠. 타자를 치거나, 무언가를 잡거나,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도 보여드리고 싶군요. 저는 이 손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거든요. 이것은 단순히 기능성이나 능동성, 주체성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제 인격이, 이 손에 얼마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저란 존재 전체가 이 두 손에 매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가끔 저는 제 두 손을 눈앞에 들고서 아주 오랫동안 찬찬히 바라봅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이요. 최소한 이 두 손을 보는 동안에는 제 현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손 역시 현존하는 건 아니지만 저의 믿음은 현존하니까요.
자, 그럼 이제 말씀해 보세요. 이미 눈치를 챘으면서도 뻔히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하시겠다는 거죠. 그래요. 그럼 손을 뺀 육체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말씀드리죠. 이 두 손만이 제가 볼 수 있는 저의 유일한 신체입니다. 아니, 아니요. 단순히 시각적인 문제인 것처럼 얼버무리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 두 손만이 저의 유일한 신체입니다. 이 세계 전체에서 – 그래 보았자 1000세제곱미터 정육면체이긴 하지만요. - 머리도, 몸통도, 다리도, 눈도, 입도 없는 손 두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꼴이죠. (사실 이것은 쓸데없는 가정에 불과합니다. 이 절대적인 1인칭의 세계에서 3인칭의 시선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 자신이 둥둥 떠다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거예요. 엘리니엄에도 중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력의 감각이 설정되어 있죠. 육체가 없는 저 역시도 중력의 영향을 받습니다. 중력은 저를 지상에 머무르게 하고 위아래를 구분하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제 영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저를 감싸는 비가시적인 피부이지요. 무의식과 의식의 불분명하지만 확고한 경계이고, 바닥이 가라앉거나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지극히 미신적인 믿음임과 동시에, ‘정상’이라는 경솔한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척도이자 토대가 됩니다. ‘정상’이 있기에 ‘균형’이 있고 ‘균형’이 있기에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똑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직립할 때 정신도 함께 직립하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신체는 일단 – 그래요, 일단 - 그렇다 치고, 오감은 어떻냐구요? 오감이 없다면 사람은 그저 냉동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텐데 말이죠. 네, 물론 저는 냉동된 고깃덩어리는 아닙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냉동될 수조차 없지만 (더 이상 이런 언급을 계속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부터 얘기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설명하기가 다소 난해하고 조잡스러워요. 제 설명이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노력해 보도록 하죠.
아시다시피 오감은 촉각, 미각, 후각, 시각, 청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가 가장 기본이 되는 감각이라고들 하지요.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을 고르라면 무엇일까요? 혹은 제일 중요하지 않은 것은요? 여러분은 이 감각 중에서 몇 가지나 포기할 수 있으세요? 아쉽게도 엘리니엄은 이 다섯 가지 감각 모두를 구현하지는 않습니다. 이 중에서 오직 3가지 감각만이 가능하죠. 촉각, 시각, 청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에게는 후각과 미각이 없습니다. 저는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향기가 있는데 향기를 못 맡는다거나, 향기가 없어서 향기를 못 맡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향기나 맛이라는 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향기’나 ‘맛’은 엘리니엄에서는 단어로만, 심지어 추억 속에서조차 단어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후각과 미각은 너무 미묘해서 오히려 현실성을 교란시킬 위험이 있는데다가 용량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고 하더군요.
아, 이런 이런, 많은 분들의 탄식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군요. 실망하셨나요? 아니, 오히려 절망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먹는 즐거움이야 말로 생명의 원동력이고 삶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잖아요. 때로는 삶 전체를 식탁으로 표현하기도 하구요. 저라고 왜 그걸 모르겠어요. 저 역시 실컷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게 먹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마음껏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허기에 시달렸던, 먹는 음식보다 버려지는 음식이 더 많았던 세대, 그러니까 에로티즘보다 더 강렬한 식탐에 중독되어 있었던 풍요 속의 빈곤의 세대인데요.
속세에 있을 때 저 역시 먹고 마시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식탐이 대단했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른지를 몰랐어요. 삼삼한 평양 물냉면, 달지 않게 푹 끓인 닭찜, 아보카도와 리코타치즈를 곁들인 따끈한 샌드위치, 삼겹살을 과하다 시피 넣고 자글자글 끓인 김치찌개, 각종 야채를 수북이 올린 비빔국수, 큼직하게 살점을 얹은 광어 초밥, 양배추와 대파를 잔뜩 넣은 매콤한 떡볶이, 설탕을 넣지 않은 연한 카페라테, 유자와 귤과 꿀을 섞은 차가운 주스를 좋아했습니다. 매 끼니마다 만찬을 즐겼고 그것이 당연한 삶의 권리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기쁨이었기 때문에, 이토록 순수하고 직접적인 쾌락은 없기 때문에, 저 역시 과연 이 풍요로움을 포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금식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아니 존재 자체를 아사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고 나니 그제서야 살아생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과 지력을 먹는 일에 소모했는지, 또 그것이 우리의 신경을 얼마나 산만하고 지치게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밥 먹고 나면 점심밥 걱정, 점심밥 먹고 나면 저녁밥 걱정을 하는 게 우리의 지난한 생활이 아니던가요. 하루 종일 오로지 먹는 생각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거기다가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식비로 부담해야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우리 자신을 밥충이라고 비하하겠어요. 고기국물, 참기름, 김치, 마늘, 치즈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우리의 삶 여기저기에는 빵 부스러기와 밥풀, 단무지, 생선 대가리, 계란 노른자, 김, 오뎅, 양파 조각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습니다. 이빨에는 늘 고춧가루가 끼어있고, 트림과 함께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구요. 하지만 더 구질구질한 건 우리가 이 구질구질함에 기꺼이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콤한 음식을 입 안 가득 쑤셔넣고 쩝쩝거리며 한 입 한 입 씹어 꿀꺽 꿀꺽 삼키면서 생명의 동력뿐만 아니라 삶의 동력까지도 최대한 빨아올리려고 안간힘을 쓰죠. 거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 기꺼이 비굴해지는 희열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 기쁨은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정당하고도 건강하며 모범적인 것입니다. 식욕은 존재를 향한 부름이자 동시에 존재의 대답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식사의 기쁨이란 일종의 존재의, 존재에 대한, 존재를 위한 선의를 확인하는 기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엘리니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은 모든 선의가 침묵하는 곳입니다. 아니, 모든 선의가 부재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자, 그러니 이제 그만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이건 부당도, 불의도, 폭력도 아닙니다. 그저 이제 그만 먹는 걸 멈추는 것뿐입니다. 그저 더 이상 먹을 필요가 없는 것뿐이에요. 단지 그뿐입니다. 그래도 정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식사뿐만 아니라 배설도 없다는 걸 상기해 보십시오. 늘 힘주어 빡빡하게 조여 있는 거북살스러운 구멍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흘러나오는 그 고약한 것들을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셨나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