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니엄 (11)

by 곡도





아, 아니오. 아니에요. 그건 자살에 대한 욕구는 아니었습니다. 자살의 ‘자’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잘도 뽑아내시는군요. 대중화된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을 동원해서 뻔뻔하게 상대방의 진의를 뒤엎어버리는 게 다시금 유행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모든 어려움을 애착 문제로 귀결시키고, 입 밖에 꺼내지도 않은 감탄사를 침묵에서 끌어내고, 사건의 선후와 인과를 바꿔치기하고, 문장과 단어를 산산이 해체한 뒤에 재조립해서 들어본 적도 없는 외국어 문장을 만들어 내죠. 자아,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자살을 꿈꾼 적이 없습니다. 아니, 자살은 아예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예전에도 지금도 저는 ‘자살’이라는 말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아시겠어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죽어 넘어져도, 그들 모두가 자살한다 해도, 끝끝내 자살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저라는 말입니다. 고집이나 집착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리둥절해서요.

그래요. 얘기가 나온 김에 아예 짚고 넘어가도록 할까요. 사실 이 글의 마지막쯤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언급됐으니 더 미루지 않도록 하죠. 엘레니엄에서의 자살, 물론 궁금하시겠죠. 어쩌면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자살할 수 있는 자유만이 진짜 자유이고, 자살할 수 있는 의지만이 진짜 의지이며, 자살할 수 있는 삶만이 진짜 삶이라고 믿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분명 자살은 결말에 관한 얘기만은 아닙니다. 생물로서의 죽음이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자살이 있는 것이죠. 어쨌든 저의 대답은, 네, 할 수 있습니다. 엘리니엄에서도 자살할 수 있어요. 계약서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고 엘리니엄 관계자에게도 재차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니엄에서 자살하려면 속세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엘리니엄에서는 스스로 죽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죠.) 그래서 엘리니엄에서의 자살이란 정식 절차를 통해 자살을 승인받는 일종의 행정적인 과정입니다. 만약 어떤 엘리가 자살 의사를 엘리니엄 본사에 통보하면 6개월에 한 번씩 총 세 번에 걸쳐서, 그러니까 1년 6개월 동안 확인 과정을 밟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살 의사를 표명한 후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자살이 집행된다는 뜻입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구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어쨌거나 영원한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요. 더 신중할 필요가 있죠. 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안락사이지 자살이 아니라구요? 자살이란 모든 제도와 허가를 부정하고 무력화 시켜서 한 사람의 삶을 뻥 뚫린 공백으로 남겨놓는 일이라구요? 자살마저 법규화 된다면 인간은 최후에 남은 반란의 존엄성마저 잃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거라구요? 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저로 말하자면 반란의 존엄성을 이미 100년 전 엘리니엄 구매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말끔히 포기해버렸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빈털터리라는 말은 저에 대한 꽤나 정확한 표현 같네요.

그나저나 실제로 정말 자살한 엘리가 있을까요? 저 역시 매우 궁금한 일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여러분만큼이나 다른 엘리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니까요. 뭐, 어쩌면 이미 몇몇 엘리들은 자살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를 제외한 모든 엘리가 자살해버렸을지도 모르구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엘리들이 감히 자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영원한 생명이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속세에서는 삶에도 죽음에도 목적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자살할 이유마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자살은 지극히 구세계적인 발상입니다. 엘리니엄에는 맞지가 않아요. 만약 정말 자살하는 엘리가 있다면 그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살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엘리니엄에서 무언가 정말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요.

자,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 역시 할 말이 별로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여러분도 그러실테구요. 그나저나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죠? 그래요. 육체가 없어서 좋은 점들을 꼽아보던 중이었죠. 육체 훼손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육체 관리의 번거로움, 육체와의 갈등과 불신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런데 아직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뭔지 짐작이 가세요? 분명 여러분의 마음에도 들 거라고 확신하는데요. 예전의 저처럼 여러분도 매일의 일상에서 그것과 투쟁하고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실질적인 하루를 구성하지요.

24시간인 우리의 하루는 1분도 더 보태거나 뺄 수 없이 꽉 짜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하루 중에 시간이 더 필요해 지면 어떻게 하나요? 오늘 내로 꼭 처리해야할 일이 있거나 한 밤중에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요. 분명 잠을 줄일 수밖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육체로부터 여분의 시간을 쥐어짜내는 것이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일이죠. 하지만 여러분, 엘리니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니엄에서는 잠을 자지 않으니까요.

설마 이것도 실망한 분이 있는 건 아니겠죠? 무조건 기뻐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네, 물론 저 역시 속세에 있을 때는 잠자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졸려울 때뿐만 아니라 기분이 울적할 때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루 종일 잠 속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물론 이대로 깨어나지 않고 영원히 잠들기를 바란 적도 있었죠. 그건 죽고 싶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아니, 오히려 정 반대의 것이지만, 종종 그 둘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어쨌거나 저는 언제나 잘 잤고, 깊이 잠들었으며, 큰 만족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저의 게으른 기질에 잘 맞았어요. 저는 꿈조차 꾸지 않고 말 그대로 곯아떨어지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진심으로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잠을 자려고 침대에 몸을 누이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잠깐의 안도감에 뒤이어 또 하루가 끝났다는 안타까움, 하루를 쓸모없이 허비했다는 죄의식, 오늘 하루만큼 죽음에 더 가까워졌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뒤척이곤 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루에 6-7시간씩 자리에 누워있어야 한다니, 인생의 거의 1/3을, 90년을 산다 해도 무려 30년 가량을 허무하게 날려버려야 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순전히 분노와 고집 때문에 불면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런 일로 애태울 필요가 없습니다. 24시간 내내 깨어 있으니까요. 하루 온종일, 그리고 오늘에서 내일로 단절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지요. 그럼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어차피 영원한 삶이기는 하지만 당장의 하루마저도 영원하죠. 굉장하지 않나요. 아니, 그런데 이상하군요.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혹시 쉼표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균질한 시간에 두려움이라도 느끼시나요? 아침마다 새로 태어나는 환희도, 새로운 각성도, 새로운 각오도, 새로운 기운도 없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세요? 뭐, 저도 그걸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자정이 지나면 저 역시 조금 서운하고 적적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요. 온라인은 결코 잠드는 법이 없지만, 온라인조차도 새벽이 되면 슬그머니 졸기 시작하거든요. 그럴 때면 저도 은근슬쩍 잠들고 싶어져요. 그래서 제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종의 요령인데요.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쯤 1시간 정도 조명을 낮추고 – 저는 눈을 감을 수 없으니까요 - 조용한 음악을 듣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나 생상스의 ‘백조’, 리스트의 ‘베르쇠즈’,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브로크백 마운틴 OST’ 같은 것들이 효과가 좋더군요. 음악을 틀어놓으면 곧바로 세상 모든 게 소음이 되고, 혼선이 일어나고, 흐릿해지고, 얼떨떨해지면서 무기력해집니다. 아시다시피 음악에는 일종의 마비 효과가 있잖아요. 애초에 모든 음악은 폭력이니까요. 그것은 파괴의 폭력이 아니라 접신의 폭력이죠. 음악이 들리면 제 안에서는 곧바로 뇌파와 음파 간의 고지전이 벌어집니다. 그럼 모든 자아가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수많은 자아들이 흘러넘치기를 반복하죠. 그러니 당사자는 잠이 들거나, 기절하거나, 미쳐버릴 수밖에요.

자, 이제 저에게 시간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을 아셨겠죠. 영원할 뿐만 아니라 무늬조차 없는 시간 말입니다. 그럼 대체 그 무궁무진한 시간을 뭘 하며 보낼까 궁금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자빠져 잠이나 자자 조차 할 수 없는 이곳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뭐라고 할까요? 심지어 매일 스케줄 표를 빼곡히 작성해야할 정도라고 한다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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