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듯이, 제가 엘리니엄 구매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독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니엄 구매를 결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역시 독서였지요. 독서가 아니었다면 엘리니엄에서 영원히 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오늘 날 여러분에게 독서는 고루하고 한심하고 시대착오적이겠지만, 어쨌거나 저의 근본은 구시대니까요. 저는 전자책마저도 꺼렸을 정도로 오래된 구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엘리들은 과연 무얼 하며 지내는지 새삼 궁금해지네요. 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내며 또 보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독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에게도 독서란 그저 핑계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 끈 이론을 연구하거나, 전 세계 언어들을 모조리 익히거나, 하다못해 모든 책의 오탈자를 낱낱이 찾아내는 일을 하면서라도 악착같이 엘리니엄에서 버텼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다행히 저에게는 독서라는 그럴듯한 구실이 있었습니다. 영원히 산다 해도 결코 완수할 수 없는, 성취도 좌절도 없는 과업이죠.
속세에서도 저는 평생 책을 읽었습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한 일이 독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제게 취미를 물으면 선뜻 독서라고 대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예 취미가 없는 사람보다 더 게으르고 한심해 보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아무런 상상력도 개성도 없다는 자기고백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런 주제에 지기는 싫어서 잰 채하는 허영꾼으로 찍히기 십상이었고, 과연 이것을 천진하게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고, 무엇보다 대화가 거기서 중단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에게 독서가 무엇인지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뭐랄까. 그냥 제가 늘 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심지어 저는 병원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던 순간에도, 아버지가 죽기 바로 직전까지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책을 읽지 않은 건 순전히 우리 가족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거나 손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다시 책을 펼쳐들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책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이미 삶으로써의 주체와 독자로써의 주체를 분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치 한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샴쌍둥이처럼요. 삶에게 독자가 붙어있는 것인지, 독자에게 삶이 붙어있는 것인지는 입장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죠. 어쨌거나 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제 옆에 다른 머리가 있었고, 우리는 같은 몸을 가지고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하나뿐인 몸의 사용과 이용 순서에 대해서는 서로 긴밀히 협의해야 했지만요. 우리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살의는 있었지만 혐오나 증오는 없었습니다. 같은 향수를 공유했고 서로를 존중했으며 때로는 응원하기도 했죠. 물론 대부분은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요. (아, 갑자기 추억에 젖게 되네요. 딱히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함께했던 세월이 있으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국적을 묻는다면 저는 책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그 어느 곳도 아닌 책에서 태어나, 책에서 살았고, 책에서 죽었으니까요. 독서는 제가 살아있는 방식이었고, 제가 제 자신에게서 떠나는 방식이었으며,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었고, 철저하게 혼자 있는 방식이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저 자신은 제가 읽은 책들의 자투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귀하고 소중해서라기보다는 버리기 아까워서 모아놓은 여러 책들의 낱장들이였죠. 저의 인격도 온전히 책에서 한줄 한줄 베껴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풍부하고 예민하지만 어떤 역사도 개연성도 개성도 체온도 냄새도 없었어요. 저는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이듯 표정을 지었고, 책의 페이지들을 넘기듯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한권의 책을 다 읽고 덮을 때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닌, 공백조차 없는 하나의 지점이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그제야 공백이 열리지요. 독서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공백으로 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독서를 많이 해도 저는 책의 내용을 단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좋아하는 책이 무어냐고 물어도 바보처럼 어물거리기만 했고, 여러 번 읽었던 책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읽고 있을 때에만 정신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일에는 너무나 미천하고 미숙했기 때문에, 곁에 책이 없으면 하다못해 전단지라도 읽어야 했고, 그마저도 없으면 간판을 읽고, 안내 표지판을 읽고, 버스 노선표를 읽고, 신호등을 읽고,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읽고, 나무를 읽고, 전봇대에 뒤엉킨 전깃줄을 읽고, 자전거를 읽고, 보도블록의 깨진 틈을 읽고, 자동차의 얼룩을 읽고, 굴러다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읽고, 구겨진 종이컵을 읽고, 담배꽁초를 읽고, 햇빛을 읽고, 바람을 읽고, 사람을 읽고, 사람이 하는 말을 – 듣지 않고 - 읽었습니다. 때로는 제 자신이 작은 회색의 전두엽 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바다 표면에 둥둥 뜬 채 물결을 따라 흘러가며 미생물 무리를 삼키고 있는 해파리처럼요. 반면에 진짜 세상은 깊은 바닷속 너머 어딘가, 어쩌면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저 세상 너머 어딘가인 것만 같았습니다.
(아, 어쩌면 이것은 독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평화에 대한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근 100년간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이게 진짜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저의 진짜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장된 균일한 평화, 평화라는 장르의 판타지 속에서 저는 역사에도 민족에도 이념에도 계급에도 휴머니즘에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애국심이나 정체성도 없었어요. 저는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네,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증오한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라는데, 그것은 저의 잠자리를 전혀 어지럽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적응해야하는 조건이나 감수해야 하는 불편일 뿐 저는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애국심은 저에게 혐오감이 아닌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계시적인 의식의 흐름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종교의 반열에까지 올려놓는 그 초인적인 자기애와 초월적인 헌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저에게 유리했다면 혹은 조금이라도 제 안위에 위협이 가해졌다면 미련 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이 나라를 버렸을 겁니다. 설사 지구상에서 한국이 없어진다 해도, 뭐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달라요. 전혀 다르죠. 그것은 딱히 한국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날 국가는 그저 행정의 영역일 뿐이니까요. 말하자면 한국어는 한국 그 이상이지요. 한국이 쓰는 언어가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에요. 좀 더 말해도 될까요. 한국어는 신성합니다.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어가 빠져나간 영혼은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말 겁니다. 세계는 전체적으로 그러나 무엇보다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될 거예요. 음탕해지고 비굴해지고 기호적이 되고 말테죠. 네? 너무 감상적이라구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낭만이나 열정, 자의식이나 정체성,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의학만큼이나 지극히 형이하학적인 얘기에요.
모든 본질이 사라진 지금 저에게는 한국어만이 유일한 본질입니다. 저는 오직 한국어로만 실존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저는 책을 많이 사 모았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책을 빌려보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지요. 빌린 책을 반납할 때마다 책뿐만 아니라 제가 한 독서까지 도로 반납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제가 구입했던 책들의 금액을 모두 합산해보면 제법 큰 재산이 되겠군요. 저는 옷, 가방, 보석, 가구, 차, 집, 그밖에 무엇에든 돈 쓰기를 아까워하는 구두쇠였지만, 그리고 돈에 대한 무한한 공경심과 두려움 때문에 돈 쓰는 것 자체를 일종의 신성모독처럼 느끼고 있었지만, 책을 위해서라면 결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책값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천원, 몇 만원, 가장 비싼 책이라고 해도 십 여 만 원 정도가 아닙니까. 책을 쓰기위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작가들의 재능과 영감의 결실을 단돈 몇 푼에 살 수 있다니, 그거야 말로 악마가 개입했을 법한 일이죠. 만약 시장에서 어떤 상인이 금괴를 벽돌 값으로 팔고 있다면 설사 금괴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일지라도 빚을 내어 그것을 수중에 움켜쥐쥐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천치나 미친 사람만이 감히 그러한 기적과 같은 횡재를 나 몰라라 할 거예요. 그러니 마치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꾼처럼 제가 책만 보면 몸이 달아 손이 벌벌 떨리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책에 대한 저의 욕망은 지적 허영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자본주의적 손익계산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사들인 책들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한 번에 몇 백 권씩, 혹은 몇 백만 원 어치씩 살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책을 사들였다는 점입니다. 가히 쓸어 모았다고 해야 할까요. 취향과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딱히 읽고 싶지도 않은, 심지어 2-3살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까지도 마구잡이로 구입했습니다. 차라리 불쏘시개로 쓰는 편이 더 유용할 허접한 책들까지 예외가 아니었지요. 뭐, 저에게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습니다. 아무리 종이에 잉크를 찍어 바른 것에 불과한 하찮고 저급한 책일지라도 종이에 잉크를 찍어 바른 것에 불과한 돈 보다는 더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만약 책의 가치를 내용이나 저자에 따라 차별한다면 그건 인종차별이나 인종우생학 같은 끔찍한 범죄가 아닐까요?
네, 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죠. 여느 속물들처럼 저도 독서와 상관없이 책 자체가 좋았습니다. '가벼운' '두 손 크기의' ‘꽉 닫혀있는’ ’직육면체를’ '벌려서' ‘펼치면’ ‘감춰져 있던’ ‘내부가’ '활짝' ‘열리며’ ‘정교한’ ‘활자들이’ ‘직사각 형식으로’ ‘정밀하게’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 좋았구요, 아름다운 그림과 글씨체가 어우러진 표지 디자인의 매력적인 다채로움, 한 덩어리로 단단히 굳어 있다가 속을 가르면 백치처럼 사그락거리는 백지의 부드러운 감촉, 그 위에 정확하게 일 열로 줄을 맞추어 확고하게 찍혀있는 융통성 없는 글자들의 질서와 권위, 그 모든 것들이 자아내는 기계적인 무심함, 그리고 묵시록적인 존재감과 비존재감까지 모두 좋았습니다. 반면에 저는 사본이라든지, 희귀본, 초판본 등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책들에게는 거부감이, 거부감을 넘어 섬뜩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경외심을 가져야한다는 건 가혹한 일이죠. 그런 책들은 실상 책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야 말로 ‘성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독서가 아니라 기도를, 애정이 아니라 헌신을,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요구하니까요. 반면에 저는 수천, 수만 부씩 인쇄기로 찍어져 나와 유일하지도 귀하지도 않은 책들이 좋았습니다. 소탈하고 경박하고 흔하고 저렴하고 실체적인 본질과, 교만하고 진지하고 유일하고 고귀하고 추상적인 실존이 서로에게 기생하는 그 부조리함이 좋았어요. 서로가 허물이 없고 연민과 냉소를 동시에 불러일으키지요. 그래요. 연민과 냉소야 말로 독서의 전부일 겁니다.
결국에는 독서를 하기 위해 책을 사는 건지 책을 사기 위해 독서를 하는 건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만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게 우연히 한 사람인 경우라고 해야 할까요. 이게 과연 행운인지 낭패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문제는 책 읽는 속도가 구입하는 책의 증가량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제 집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르르 몰려온 책들이 제 집으로 쳐들온 것 같만 같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비록 내 소유라고 해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일종의 납치가 아닐까요? 아니, 그들이 나를 납치한 게 아니냐구요. 내가 독자가 아니라면 책과 나는 과연 어떤 관계인 걸까요? 문제는 영원히 펼쳐보지 않은 책도 결코 그냥 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저 잉크 자국이 있는 종이 뭉치가 될 수는 없어요. 냄비를 받치거나 책장 다리를 고이려고 하면 비명을 지르고, 불 쏘시개로 쓰려고 해도 그것은 화형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결코 침묵하지 않는 책의 침묵. 그것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겁니다. 그럼 나는 책을 움켜 쥐고 펼쳐 들고 읽던지, 한 장 한 장 잘게 갈기갈기 찢어 발기던지, 그도 아니면 짐짓 모른 척 하면서도 귀신 들린 것처럼 책 주변을 계속 해서 맴돌게 되죠.
거실과 모든 방들, 심지어 부엌과 세탁실, 화장실에까지 책들이 쌓여갔습니다. 천정까지 들어찬 책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졌고 책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까지 작성해야 했습니다. 자칫 책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깔려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결코 과장된 우려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떨어져 내리는 책에 부딪혀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으니까요. 사실 처음에는 이 모든 게 즐거웠습니다. 천적인 새가 없는 거대한 새장 속에 갇힌 생쥐가 된 것만 같아서요.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를 헤매면서도 오직 나만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안해지죠.
그러나 결국 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 책들을 다 읽지 못할 거라는 염려와 부담이 – 그것은 결국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 평생 동안 저를 짓눌렀습니다. 책을 읽는 와중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마치 누군가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쫓기듯 책을 읽는 것만 같은 피해망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세상 책들을 전부 읽을 수 없다는 좌절감, 과거에 출판된 책들뿐만 아니라 미래에 출판될 책들 역시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실망과 질투가 저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들을 전부 다 읽지 않고는 도무지 죽을 수조차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어처구니없는 게 뭔지 아세요? 모순이라고 해야 할지 역설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면 할수록 그 시간이 아까워서 미칠 지경이었다는 겁니다. 인생에서 독서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독서에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독서가 마치 중대한 범죄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제 자신이 악독한 범죄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진저리를 치곤했다니까요. 하긴 오로지 소비자로써만 존재하는 완벽한 제삼자인 독서가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에 기생하는 비열한 범죄자가 아닐까요. 정말 독서는 고약한 짓인지도 몰라요. 독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잘라내고, 사람을 글을 아는 천치로 만들고, 의미로 목을 조르고, 뇌에 숭숭 바람구멍을 뚫고, 핏방울 하나하나에 문자를 새기고, 인간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의 구별을 무뎌지게 하고, 인위적인 것과 문법적인 것의 차이를 지워버리죠. 두꺼운 책갈피 사이에 짓눌려 낙엽처럼 바래고 납작해진 사람들을 저는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잊고, 자기 자신을 잊고, 오로지 읽은 책의 목록으로만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 보곤 하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