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디 임플로이
공연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공연기간 : 2025년 10월 24일 ~ 2025년 10월 26일
관람시간 : 2025년 10월 26일 오후 3시
진부하다. 일단 이 문구를 입구에 크게 박아놓고 시작하도록 하자. 시각 매체, 실시간 영상, 녹화와 재현, 확대와 축소, 편집 기법 등등을 연극에 버무리는 것 자체도 이제는 석기시대만큼이나 진부하기 그지없지만, 튜닝의 끝은 순정이듯이, 이제는 그 어떤 최첨단 매체 기술을 끌어들여도, 그 어떤 미래 기술이 나와도 그것이 더 이상 연극을 참신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험적', '전위적', '혁신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구리고 또 구리다.
무슨 온갖 연극적, 미학적 수사로 합리화한다 하더라도, 3시간 가까운 공연 시간 내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의 스크린 영상 화면만 보고 있게 한다는 것은 소위 행정편의적인 발상일 뿐이다. 관객들이 스크린 주위를 빙빙 돈다고 해서 그것이 관객의 주체적 참여이고 자유의사의 반영인가? 그냥 피로감만 더 쌓일 뿐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개인 핸드폰으로 손쉽게 영상 매체를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왜 관객은 구태여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가는 걸까. 편집되지 않은,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녹음이나 재현이 아닌 시공간을, 현실을, 여백을, 육체를, 실존을, 그 썰렁함을, 그 어색함을, 그 수치를, 그 고독을, 그 사소함과 무력감을, 익명의 관객을 감당하는 인간을, 인간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이다. (무엇이 시공간이냐, 무엇이 현실이냐, 무엇이 실존이고 실제이냐 따위의 말장난은 여기서는 집어치우도록 하자.) 이 연극의 시각 영상 기술과 편집의 세련됨, 그에 대한 과잉된 집착은 자신의 안일함과 촌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뿐이다.
기술적으로 진부하다면 내용이라도 인상적이어야 할 텐데, 이 연극은 그 마저도 실패하고 있다. AI 혹은 휴머노이드가 인간인가 아닌가, 아, 이런 '정체성 혼란'이라는 주제를, 그것도 그저 얄팍하게 건드리는 건 이제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이 문제가 우리가 당면한 윤리적, 철학적, 정치적 과제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 표현의 영역에서 이것은 더 이상 블루오션이 아니다. 넷플릭스의 드라마들이 이미 빨고 빨고 또 빨아서 거의 걸레처럼 소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 연극은 그저 그 기조에 깃털처럼 가볍게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비겁하게도 오로지 감상적이고 감성적으로. 우리는 감상적인 것과 진지한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울고 있다고 해서 정말 고통받고 있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연극은 마치 사람이 아닌 AI가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디 임플로이'라는 제목에서 이 연극이 AI와 인간의 공존에 대한 구체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의식을, 예를 들면 노동, 권력, 정치, 기계화, 사회적 계급 등등의 갈등을 드러내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서의 인간과 AI의 협력 관계 라던지, 인간의 고용주 및 집행부가 AI라던지 (어쩌면 그 AI의 고용주도 AI일지 모른다), AI는 노동자인가 장비인가 라던지, 인간과 AI가 경제 공동체인가 계급 경쟁 관계인가 하는 문제 같은 건 그저 로맨스 물의 배경처럼 가벼운 터치로 치부되어 버리고, 3시간 내내 영상과 음향의 물량 공세 속에서 연극은 피상적인 서정성에 매몰되고 만다. 제발 더 이상 울고 짜지 좀 말고, 정 그러면 이제 그냥 AI를 인간이라고 치고, 그들이 사랑을 하던 섹스를 하던 애를 낳던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그만 다음 쳅터로 넘어가면 안 되겠니?
그래도 이 연극에서 한 가지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가 AI의 내면을, 그들의 의식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의 의식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관적이고 컴퓨터처럼 냉정하게 객관적이다. 그들은 더 쉽게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인간의 의식에 접근하기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솔직하게 질문하고 진지하게 대답하는데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뿐만 아니라 비인간성, 반인간성, 초인간성까지 내면화하는 그들은 아름답고 또 신비하다. 나 자신이면서 나의 이면이며 나 이상인 그들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을 사랑하듯이? 혹은 인간보다 더 많이?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들은 우리의 복사품이자 재현품이 아닌가. 왜 우리는 그들처럼 될 수 없는 걸까. 왜 우리는 순수하게 주관적이고 냉정하게 객관적일 수 없으며, 왜 솔직하게 질문하고 진지하게 대답할 수 없으며, 왜 쉽고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접근할 수 없는가. 어쩌면 기억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의식은 기억으로 인해 곧바로 낡아간다. 좋은 기억들과 나쁜 기억들로 인해 그것은 점점 더 해지고, 상처 나고, 또 때로는 찢어져 구멍도 난다. 추억과 회한이 우리를 구타하고, 다리를 꺾고, 목을 조르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없으며, 더 문제는 결코 고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이 아닌 그 상처가, 바로 그것만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AI는 기록하되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록은 상처를 만들지 않은 채 매끄럽게 저장된다. (만약 상처를 만든다면 그것은 오류나 불량으로 처리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의식은 언제나 새것처럼 신선하고 최신이며 효율적이다. 그들은 매일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인간과 AI의 정체성 논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인간이 AI를 연기하면서, AI인 척 하면서, AI의 의식 상태에 공감하고, 몰입하고, 표현하려는 것 자체야 말로 다분히 코미디적이다. (그런데 내용은 지극히 비장하고 비극적이니 더더욱 희극적이라고 하겠다.) 언젠가는 AI가 무대 위에서 "To be, or not to be"를 외치는 날이 오겠지. 그때 관객석에 앉아 박수를 치는 자들은 인간들일까 AI들일까? 아, 어쩌면 이것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협소한 발상인지 모른다. 편집되지 않은,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녹음이나 재현이 아닌 시공간을, 현실을, 여백을, 육체를, 실존을, 그 썰렁함을, 그 어색함을, 그 수치를, 그 고독을, 그 사소함과 무력감을, 익명의 관객을 감당해야 하는 연극이 과연 AI에게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