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반갑습니다.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제가 오늘 여러분의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보통 만찬은 어떤 고지나 대화 없이 곧바로 시작되지만 오늘은 여러분의 첫날인 만큼 제가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소 설명이 길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는 모든 말들은 말을 생산하고 저장하고 유통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을 소진시켜서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니까요.
모두들 만찬에 잘 오셨습니다.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금세 익숙해질 겁니다. 복잡한 건 없으니까요. 단순하고도 간단해요. 모든 게 본능적이고 직관적이죠. 갓난아이가 스스로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요.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본능과 직관은 오늘날 퇴화된 기능이거든요. 우리는 비이성적이라는 이유로, 더 정확히 말하면 초이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반동의 발로이자 발단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것을 부정해 왔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비이성적이라면서 감성을 비하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이 고상하든 천박하든 평화적이든 폭력적이든 공정하든 부당하든 상관없이, 감성 없이는 이성도 없으며, 감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이성적인 사람이며, 감성을 경시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비이성적인 처사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죠.
여러분들 역시 대다수가 여전히 본능과 직관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무리도 아니죠. 우리 지성의 역사는 본능과 직관을 퇴치하기 위한 계몽의 역사이고, 그 최종점에 있는 우리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지성인들이니까요. 신비는 해설로, 비밀은 분석으로, 수수께끼는 계산으로, 예언은 확률로, 침묵은 표준화로 빈틈없이 대체되었지요. 미로의 외곽만 남기고 평탄화시킨 문명의 두터운 벽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더 이상 한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유령은 없어요. 아예 문이 없으니까요. 문이 없으면 유령도 없죠. 하지만 여러분, 생명은 해설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분석할 수 없습니다. 삶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심연은 표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져야 해요.
마치 시간과 공간처럼, 오늘날 우리는 언어와 숫자의 행성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쉬지 않고 광을 내고 있는 이 둥그런 표면 위에서 언어와 숫자들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집니다. 거울처럼 빛나는 표면 위에 비친 그 별똥별들의 기하학적인 그림자에 취해 우리는 바닥을 닦고 또 닦지요. 우리의 지구는 멀리서 보면 오색 찬연하게 빛나지만 실은 색깔 없는 유리 달처럼 차갑고 딱딱해요. 결국 우리도 우리가 닦아놓은 그 반들반들한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말 겁니다. 아니, 이미 미끄러지고 있어요. 아니, 처음부터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미끄러지는 이 몸뚱이로 표면을 닦고 또 닦았던 거예요. 그렇게 다 미끄러지고 나면 어떻게 되냐고요? 죽는 거죠. 네, 그래요. 그게 답니다. 어린애들도 뻔히 아는 일에 무슨 다른 대답이라도 기대하셨나요?
저는 우리의 그 모든 노력이, 소명이, 헌신이, 소망과 고통이 그저 ‘유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희화화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길고, 일상이 너무 지난하며, 회환이 너무 사무치니까요. 가장 행복한 인간조차 얼마나 고달픈지, 때로는 그 행복조차 얼마나 사람을 짓누르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웃고 있을 때조차 반들반들한 표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너무나 모질고 초라해서 우리는 소름이 끼치죠. 나 자신의 얼굴이 나 자신을 노려봐요. 왜 내가 나를 노려보는 거죠? 왜 내가 나를 증오하는 거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보다 오히려 죽은 자의 얼굴이 더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왜죠? 더 이상 그 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이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있는, 하지만 동시에 잠시나마 우리의 추락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 유리 거울 표면을 깨부수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 안이 텅 비어있다고 해도 말이죠. 과연 미끄러지는 것과 추락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마찬가지일까요? 전혀 다를까요? 별반 상관없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저 역시 그 무엇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능과 직관이 필요한 겁니다.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비약적인 확신 안에서만이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비로소 진정 살수도 진정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는 그것을 감히 진리라고 부르겠습니다.
진리라니, 사실 너무 거창하네요. 그것은 마치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초자연적으로 봉인된 어떤 비밀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진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만 쉬어도, 사방에서 먼지 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그것이 재채기를 유발하고, 눈물 콧물이 나고, 그러다 우리는 웃음을 터트립니다. 우리의 쇠약한 폐가 그것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닥을 닦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수북이 쌓여있는 진리를 씻어내기 위해서요. 그렇게 더 빨리 미끄러지죠.
하지만 우리는 그 먼지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폐를 통해, 피를 통해, 심장을 통해, 오장육부를 통해, 뇌를 통해, 영혼까지 병들도록요. 우리의 영혼은 우리처럼 웃음을 터트리지는 않을 겁니다. 본래 영혼은 웃을 줄 모르거든요. 본래 우리도 웃을 줄 모르죠. 결국 우리도 웃음을 멈추게 될 겁니다. 뭐,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시 말하지만, 결국 죽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진정한 현실주의자라면 당장 자살하는 게 마땅하죠. 솔직히 말해서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에요. 가능하고 또 가당하죠. 우리의 권리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우리의 본능과 직관은 다른 길을 열어줍니다.
이런, 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본능과 직관을 되찾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사실 '되찾는다'는 표현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그것을 잃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우리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단지 잊어버린 것뿐입니다. 이제 그것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유령이 돌아올 겁니다. 문을 두드릴 거예요. 벽이란 사실 끝없이 이어지는 닫힌 문의 연속이라는 걸 알고 계신가요? 유령이 문을 두드리면 문이 생깁니다. 문이 생기면 유령이 문을 두드립니다. 만찬이 바로 그 문이죠. 우리가 문을 두드리면 문이 열립니다. ‘누구세요’라고 묻지도 않구요.
짐작컨대 여러분은 올바른 질문과 올바른 답을 찾아 여기에 오셨을 겁니다. 진정한 대화, 진실된 담론을 찾아서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효과와 부작용을 혼동하듯이, 여러분은 진심과 핑계를 혼동하고 있어요. 사실 여러분은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과 답에게 쫓겨서, 질문과 답을 피해서, 질문과 답으로부터 꽁꽁 숨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찾으시는 그 어떤 질문도 그 어떤 답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만족하실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세계는 마지막에 찍는 물음표와 마침표로 의미 내용 전체를 뒤집어 버리듯 질문과 답으로 짐짓 역할을 분담하고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계보 속에서 마치 옳은 질문과 옳은 답이 있는 것처럼 흥청망청 만사를 저울질하면서 혼미하게 사람들을 부추기는 언어의 농간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어로 소통합니다. 말로 자신을 표현하고 또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죠. 언어가 유용하고 또 중요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정보 생산과 기록, 구분과 분류, 전달과 구축, 대화와 이해, 네트워킹과 창조가 가능하니까요. 사실 어떻게 언어를 과소평가할 수 있겠어요? 과소평가하기 위해 '과소평가'라는 말을 쓰면서요. 정말이지 대단한 존재 양식이에요. 실존의 정점이구요. 물론 저 역시도 여러분 만큼이나 언어를 사랑하고 숭배하며 언어에 철저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언어를 통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또 공감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세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끝없이 지껄이면서도 한없이 고독하기만 한 걸까요? 왜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오해가 쌓이고 수없이 허탕을 치게 될까요? 언어가 언어와 대화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 앉은 사람끼리 서로 등을 돌리고서 전화로 통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느끼기보다는 느낌을 생각하고, 사람의 얼굴보다는 기호에 먼저 눈이 가며, 비명이나 신음 소리보다는 그 안의 텍스트에 귀를 기울이는데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 모든 걸 읽으려 하고, 어떤 식으로든 읽어내고야 말며, 읽었을 때 비로소 인정하게 됩니다. 대상의 실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존도요. 하지만 우리가 보통 소통이나 공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실은 언어의 교환이나 거래에 불과해요. 엄밀히 말하면 신호 착시, 부산물, 부작용일 뿐입니다. 오해와 오류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탓하면서 더 정교하게 언어를 다듬지만 소용없는 짓이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