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정신병자들이야말로 실은 더 정직하고 영민하며,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멀쩡하게 생활하는 것이야 말로 망상이며, 어딘가 단단히 망가져버린 거 아니에요? 정상(頂上)과 정상(正像)을 우리는 혼동하고 있지 않나요? 커다란 돌덩어리를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시지프가 아닌 티토에게서 우리의 전형을 찾아야 할 겁니다. 늙지만 죽지 않고 죽지 않는데도 늙어가는 존재. 희극의 주인공도 비극의 주인공도 될 수 없는, 젊음도 신화도 없는 그는 완전히 잊힌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어두운 소금 골방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죠. 어제보다 조금,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하게, 더 늙어버리는 일상. 그가 여전히 제정신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미쳐버렸을까요?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요.
우리의 출생과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목적도 없다는 걸, 우리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는 걸,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잊혀질 거라는 걸, 설마 여러분은 몰랐다고 하시진 않겠죠? 너무 당연하고 시시해서 아는 척하는 것도 구태하고 면구스러웠던 거죠? ‘나는 우연의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워서 그저 입을 꾹 다물어 버린 거죠? 물론 그러시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우리가 살아있어도, 우리가 죽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난 적도 없고, 살았던 적도 없으며, 죽었던 적도 없는 거예요. 그건 내가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순환하지도 어딘가를 향해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역사는 특유의 진지함과 허세, 유머를 잃었고, 이제는 그저 하루하루가 개연성 있는 사건들의 나열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중심도 바다 너머도 사라지고, 지도는 완성되었고, 국가는 고향이 되었습니다. 권력이니 이념은 여전히 비극적이지만 감동이 없고, 예술이나 정치는 여전히 희극적이지만 식상하며, 과학과 경제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되었습니다. 전쟁도 이제는 터무니없는 가십과 음모론을 생산할 때만이 그나마 사람다운 흥취를 불러일으킵니다. 구름은 하늘에 고정되고, 바람도 불지 않고, 황혼과 여명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신화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었고, 종교는 이제 자궁이 없는데도 신에게 다리를 벌리는 마리아와 같습니다. 이대로 또 몇 천 년이 흐르겠지만 더 이상 세상은 웃음을 터트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을 겁니다.
이 무한한 평면의 변두리에서 우리는 가족도 부모도 없이 고아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미적지근한 평화 속에 홀로 방치되어 울음을 터트리다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부르르 떨었습니다. 때때로 텅 빈 영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악귀처럼 덤벼드는 꿈의 그림자들과 싸워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내심 그들이 이기기를 바라면서요. 이제 우리는 편안하며 더 이상 무언가를 원하지도, 원하지 않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늘이 어제보다 더 편리하기를, 오늘이 어제보다 덜 부끄럽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기발한 것은 우리에게는 굶어 죽을 염려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정말 기이하다는 걸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단 70년 전만 해도 가능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죠. 그때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굶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사정이 어려우면 병에 걸려도 치료하지 못할 수 있고, 배우고 싶어도 교육받지 못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이 있어도 가지지 못할 수 있지만, 굶어 죽을 염려는 없습니다. 절대 굶어 죽게 놔두지 않아요. 현대 사회는 자신들의 구성원이 굶어 죽는 걸 끔찍이도 수치스러워하니까요. 물론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고, 결국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지만요.
우리는 먹을 걸 무상으로 얻기 위해 구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구걸도 노동으로 인정받는 세상이잖아요. 우리는 그저 가까운 주민센터를 방문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딱히 모욕적이지도 번거롭지도 않은 절차를 거치고 나면 먹을거리는 저절로 나옵니다. 별 노력 없이도 생명은 저절로 연장돼요. 이 세상에 그런 특권을 가진 생명은 없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죠. 심지어 개중에는 음식 투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걸요. 기호 식품이나 사치품을 요구하기도 하구요. 이제 생존이란 삶의 질의 문제이고, 국가는 구성원들에 대해, 누구라도 막론하고, 무한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물론 그것은 분명 옳은 일입니다. 그 누구도 굶어 죽지 않는 것, 가장 비참한 고통이 사라지는 것, 약육강식의 섭리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것은 단연코 고귀한 일이에요. 그런데, 글쎄요, 어째서인지 우리는 자꾸만 멍해집니다. 방관해도 되는 것과 방관해야 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내가 나 자신에게 당사자가 아닌 3자라면요? 과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죠? 아니, 내가 꼭 감사해야 해요?
굶어 죽을 염려가 없다면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어쨌든 뭔가 하기는 해야 하니까요. 우선 돈을 벌어야죠. 놀랍게도 돈이 여전히 평가 절하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네? 돈이 표준인 시대, 돈이 최고인 시대, 그 어느 때보다 금전만능 시대에 대체 무슨 얘기냐구요? 천만해요. 그걸로는 부족하죠. 우리는 더 조아려야 합니다. 더 칭송하고 더 매달려야 해요. 더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돈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바로 가치 자체니까요. 그런데도 은근히, 틈만 나면, 돈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돈의 절대성을 얕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배은망덕한 일이죠. 우리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믿고 싶어 하는 순교자처럼 굴고 있어요. 돈에 대해 초연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나 허언증 환자, 아니면 광신도일 겁니다.
우리는 돈이 단순한 조건이나 도구가 아니며, 오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돈은 가장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성하고, 우리의 속물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영적인 욕구까지 채워주죠. 돈이야 말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구분 지어 줍니다. 아니, 그건 언어가 아니냐구요? 흠, 그 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우열을 가려야 할까요? 인간이 여자와 남자의 결합으로 태어나 여자와 남자로 이루어지듯, 돈과 언어의 결합으로 태어나 돈과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아, 그럼 곧장 어느 쪽이 여자이고 어느 쪽이 남자냐고 따지시겠죠. 여러분은 언제나 성별에 있어서 집요하며, 그 부분이 분명치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까요. 뭐, 굳이 따지자면 언어가 남자라고 합시다. 남자가 최초의 인간이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돈은 언어의 옆구리에서 태어났구요. 이는 나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니.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돈이 따온 선악과를 나누어 먹은 둘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깨닫고, 수치스러워하고, 몸을 섞고, 또 섞고, 계속 섞어서, 결국 사랑의 결실, 죽음을 낳았습니다.
돈은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며 절대적으로 본질적이고 절대적으로 실존적입니다. 그게 가능한 건 세상에 오직 신밖에, 그것도 어느 찰나에 최고도로 고양된 신 밖에 없기에, 돈이야 말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의 독생자라 할 만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에게 올리는 기도가 그 어느 신에게 드리는 기도보다 더 진실하고 간절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에 대한 사랑만큼 진실한 사랑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돈을 사랑해요. 사실상 우리는 돈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고, 벌고 있으면서도 더 벌려고 하고, 언제나 돈, 돈, 돈, 돈 생각으로 꽉 차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속물입니다. 그러니 속물이 아닌 척하기 위해, 속물이 되지 않기 위해 고통받지 마세요. 돈에 대한 사랑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단언컨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그는 아예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