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찬 (4)

by 곡도




아, 혹시 실존주의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사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말끝마다 철 지난 실존이니 실존주의를 들먹이며 뒷북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이미 실존주의를 넘어 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최근 들어서는 신유물론이니, 객체지향 존재론이니, 사변적 실재론이니, 비판적 실재론이니, 포스트휴머니즘이니, 트랜스휴머니즘이니, 탈인간중심주의니, 탈인류주의 등등등이 판치고 있는데 말이죠. 네, 오늘날 다채로운 이론들이 넘쳐나며 그 모든 것들이 실존주의를 부정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형국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건 그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에요. 일종의 블랙 코미디랄까, 바보인 척하는 바보들의 대행진이죠. 실존주의야 말로 지금도 실질적이며 언제나 유일한 철학 사조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실존주의를 부정하거나 실존주의에 대항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반실존, 반주체, 반인본 혹은 비실존, 비주체, 비인본을 내세우면서요.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닌 그들의 현존을 해석해야 해요. 말의 내용이 아닌 말의 형태와 색깔, 냄새, 촉감, 맛을 번역해야 합니다. 그들의 동기나 의도가 아니라, 말의 동기나 의도가 아니라, 그들과 말이 서로 공모하고 또 서로 기만하는 쾌락과 결핍, 애착, 애증, 편향, 욕망, 그러니까 무의식을 해명해야 하죠.


실존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실은 그 누구보다 실존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직접적 계승자들이며,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그 순간에야말로 가장 실존적입니다. 철학이 철학을, 언어가 언어를, 생명이 생명을, 사랑이 사랑을, 실존주의자가 실존주의를 부정할 수는 없는 거예요. 설사 쉬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조차 말입니다. 신화와 역사와 종교와 정치와 심리학에 이어, 패러독스가 이토록 노골적이고 뻔뻔한 적은 없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오늘날 실존주의자들은 ‘악’이라는 단어를 꺼려합니다. 일종의 트렌드라고 할까, 이제 ‘악’이라는 표현은 어딘지 촌스럽고, 교조적이고, 보수적이고, 미신적이고, 편향적이고, 무식해 보인다는 거죠. 한마디로 폼이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패션이 언제나 의미나 가치보다 중요하며 오늘날 패션이야말로 바로 의미나 가치 자체라는 걸 대중 권력에 예민한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실상 ‘악’을 떠올리면서 '악'에 대해 말하면서도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한 채,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 전지적인 척하며 ‘위험’이니 ‘병리’니 ‘일탈’이니 ‘억압’이니 ‘균열’ 같은 진보적 단어들로 ‘악’을 지우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 강박적으로 ‘악’의 담론을 실천의 세계로 소환하고 강화합니다.


만약 그런 그들이 정부를, 가진 자를,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을 비난한다면, 더 나아가 정부와 가진 자와 지식인들이 바로 '악'이라고 암시한다면, 그건 정부와 가진 자와 지식인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소비-권력자인 대중의 숫자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애정결핍 환자인 신처럼 그들 역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니까요. 지금은 지식인들도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팔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지식인들도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팔고 싶어 하는 시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대중의 실존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아부하면서 지극히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들에게 지극히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호소하는 기회주의자, 이중 스파이, 세일즈맨, 즉 전형적인 실존주의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니까 진실은, 오늘날 우리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실존주의자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철저하게 실존주의자이며 실존주의야 말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탯줄을 두 손에 움켜쥐고서 태어났습니다. 마치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자발적으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요. 자유 의지는 진화의 임계점을 넘어 이미 우리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돌연변이로부터 꺾어진 진화가 적통이 되고 또 정통이 되듯이, 기형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끊임없이 강화되는 법 지상주의, 복지제도의 사육화, 경제 추상주의, 치안과 안보 강박, 평화에 대한 맹신, 정보 민주주의와 가치 상대주의의 범람, 식량과 물자의 과잉, 의무 교육의 평준화, 상식의 만연, 정신과 상담의 과잉, 대중-소비 주체의 신자유주의, 소수자와 약자 보호라는 옳고도 정의로운 테라리움 속에서 우리는 눅눅한 돌 틈에 피어나는 이끼로 배양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습니다. 옳은 건 언제나 옳으니까요. 옳기 때문에 옳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만족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게 마땅하고 당연하며, 살아가려면 자기 자신부터 긍정해야 하죠. 어쨌든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고, 내일은 오늘보다 진보하며, 결국은 진화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진화하고 있나요? 혹시 퇴화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설사 퇴화에 퇴화를 거듭하더라도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게 마땅하고 당연하며 스스로에게 지극히 호의적일 걸요. 우리는 앞으로 한 발씩 내딛지만 그렇다고 정말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를 지탱하는 건 오직 자유에 대한, 그리고 자유 의지에 대한 환상인 듯합니다. 나는 자유롭다는,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신화. 해외여행을 가서 일주일에 몇 백, 몇 천만씩 쓰면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릴 때면 잠깐씩 충족되기도 하는 그런 환희. 우리는 평생을 오로지 자유롭기 위해 허덕이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써 결국 자유로워지죠.


이런, 자유라구요? 제가 지금 자유라고 했나요? 세상에, 누가 죽음을 자유라고 생각한답니까.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옷을 갈기갈기 찢어 재끼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두 주먹으로 번갈아 내리치면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오열하고 토악질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왜 이렇게 된 걸까, 당장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가 그만 그대로 펄쩍 뛰어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저 매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성공적으로 참아 넘깁니다.


놀라운 건 우리 모두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자신하죠. 마치 자유가 오로지 선택과 의지, 노력의 문제인 것처럼요. 우리는 자타공인 자유로워야 하기에, 그것만이 나의 가치와 수준을 보장하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점점 더 작은 것에 매달립니다. 나도 충분히 소유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작은 것, 남들과 혹은 남들이 비교 평가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것, 실망하지 않을 만큼 구질구질하고 소소한 행복에요. 그렇게 우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모험을 끝내고 돌아와도 우리가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는 걸, 우리의 모험이 짧은 여름철 휴가라는 걸, 미지의 세계가 그럴듯하게 꾸며진 관광지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만 가장 익숙한 곳에서 미아가 됩니다. 우리는 정말 어디로든 갈 수 있나요? 원하는 곳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는 곳으로두요? 그것이 자유인가요?


우리는 숭고하고 위대한 실존의 미천하고 비루한 본질을 납득하지 못해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습니다. 어쩌면 자유는 실존의 조건, 근거, 형식, 실현, 가능성, 결과 따위가 아니라 그저 실존의 진통제로서 사후에 개발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각종 미디어들은 그 진통제 처방을 남용하는 돌팔이 의사들이구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미성숙하고 무능하며 염치없는 응석받이 대중을 빨아주는 자위 기구가 되어 방황, 조난, 표류를 나다움, 여정, 경계 넘기 따위의 용어들로 교묘하게 세탁해 왔습니다. 아무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루저들을 꼬드겼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선동하면서 애초에 결과란 없다는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평생 자신을 치유하는 데만 몰두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피해망상 호소인으로 만들었구요, 누구나 유일하고 특별하다고 호도하면서 유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충동질했습니다.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실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실존하는 게 아니라 본질에서 낙오되었기에 실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무리 거칠 것이 없고 아무리 빠른 속도라고 하더라도 추락은 자유가 아니잖아요. 아무리 느긋하고 아무리 완만한 속도라고 하더라도 추락이 자유가 아닌 것처럼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눅눅한 돌 틈에 피어난 이끼도 우리만큼 실존해요.


여러분,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입니까?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그리고 죽어야 한다는 걸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정말 알고 계세요? 정말이요? 진짜로요?


닳고 닳아 이미 너덜너덜해진 질문이지만, 우리는 신물을 참으며 되새김질하듯 씹고 또 곱씹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 날파리처럼 윙윙대며 꼬여드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신경학적, 철학적, 종교적 주장들을 손을 저어 휘휘 쫓으면서요. 우리가 이 질문을 하고 또 하는 건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네, 애초에 답을 찾을 생각 같은 건 없었죠. 답이 어렵거나 묘연하거나 감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답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건, 방금 말했다시피,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두려울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절망적일 때나 죽고 싶을 때에도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니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요. 하지만 수천수만 번 이 질문을 되풀이해도 좋습니다. 영원히 할 수만 있다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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