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사무실을 깨운다.
청소 아주머니들은 창문을 열어 건물에 콧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파리가 낙상할 만큼 바닥을 닦았다.
“수고하십니다”라고 말하면 그녀들은 해바라기처럼 웃는다.
“심심할 때 드세요”라고 초코파이를 건네면 손사래를 쳤다.
“제가 여사님에게 꼭 드리고 싶다”라고 간곡히 부탁하면 그제야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청소부뿐만 아니라 경비 아저씨와 버스 기사 등 주변에서 만나는 분들은 인사의 무게가 다르다.
그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가 묵직하면서도 따뜻하다.
반면 이해관계가 얽힌 이에게 고개 숙이면 그런 무게감이 들지 않아 가벼운 인사를 드리는 수준의 관계를 맺는다.
다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는 데도, 유독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중간 간부가 있다.
그는 실력보다 처세술에 따라 행동하므로 윗사람의 권력 앞에 숙인 벼처럼 고분고분하다.
그런 다음 그는 아랫사람에게 예절을 빙자하여 위세를 떨었다.
그다지 큰 권세도 아니면서 자신은 대단한 권력자처럼 부하직원에게 군림하려 들었다.
그땐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그를 민들레 씨앗처럼 가볍게 대하자.
예는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지 존중하라고 강요하면 우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인간을 만날 수 있으나, 숨겨진 인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때 낮은 자를 대하는 자세는 인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인품을 갖춘 이는 먼저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며, 타인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쏟는다.
미국 대통령이 명예훈장을 받은 사병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을 방영한 바가 있다.
지위를 따지는 우리나라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까.
스스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고,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직장인은 인구의 절반이 넘고, 직장을 그만두는 나이인 66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약 40%로 OECD 회원국 중 1위이다.
이들이 재취업이 힘든 이유는 이전 직장에 너무 의지하고, 이미 높아진 눈높이 때문이다.
특히 조직에서 몸담았던 사무직은 집단주의 시스템에서 부품으로 일했기에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것은 재직한 회사에 한정될 뿐, 다른 기업에서 적용할 수 없다.
사회에서 잘나가던 회사원이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평소 누군가에는 사소하게 보이지만, 맡은 업무에 감사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는 쉽게 구직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일터에서 마련해준 명함에 심취한 이는 단물이 빠지기 전까지 새 직업을 구하기 힘들다.
당신이 구석으로 밀려난 나뭇잎이 되었다고 과소평가하지 말자.
나무는 다 계획이 있다.
나무에서 꽃과 잎이 핀다.
모두가 화려한 꽃이 될 수 없다.
누구는 꽃이 되고, 누구는 잎이 된다.
잎이 되어 꽃을 섬기듯 낮아짐으로써 소소한 것이 주는 감사의 의미를 깨닫는다.
향기로운 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면 그 삶 또한 아름답지 않을까?
이젠 꼬마에게도, 새에게도, 풀꽃에도 먼저 고개를 숙여보라.
오늘 마주친 이를 내일 보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내일은 당신이 이 세상에 없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