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tergrapher Jan 25. 2017

Scents in memories

후각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저편



 회사에서 2017년 다이어리와 달력을 지급받았다. 작년보다 디자인도 색깔도 더 예쁘다. 어느덧, 벌써 연말이다. 커버를 여니 아직 마르지 않은 향기가 은은히 풍겨온다. 아마 종이 결을 매끈히 하고 미색 처리하는 데 사용된 약품 냄새일 것이다.

 

 종이와 종이 사이 갈라진 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니 이 향기가 20여 년 전 기억으로 나를 이끈다.


 엄마는 동생이 국민학교를 들어가던 무렵에 우리 형제에게 현관문 열쇠를 복사해 목에 걸어주시곤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엄마가 처음 하신 일은 어린이 도서와 학습지를 만드는 회사의 영업 일이었다. 덕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 책들에서도 오늘 맡은 것과 같은 향기가 났다.


 ABC 알파벳도, 우리나라의 역사도, 사막과 바다, 천체 그리고 다양한 동식물의 이야기도 그때 엄마가 사다주신 전집을 통해 처음 접했다. 책이 배달되던 날이면 동생과 함께 큰 부엌 가위를 가져와 상자를 뜯고 신나서 책을 풀어보았는데, 책장을 넘기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새 책 향기, 후각만큼이나 지적 욕구를 자극하던 그 출판사 특유의 마성적 향기가 참 좋았다.




니베아 핸드크림을 바르면, 매번 겨울 훈련소의 추억이 떠오른다.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도 니베아 핸드크림을 바르면 매번 겨울 훈련소의 추억이 떠오른다. 마치 반사신경을 일으키듯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또 다른 이 기억.


 2004년 1월 7일, 입대하기 하루 전 밤까지 나는 동아리 행사 준비 때문에 군대 갈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르지 못한 것은 물론, 테가 튼튼한 안경을 준비하지도 못했고(당시 안경은 무테),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도 거른 채 자정 넘어 집에 들어왔다.


 그 날, 한양대 상경관에서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동아리 누나가 핸드크림 하나를 건넸다. 겨울에 군대 가면 손 많이 갈라지니까 짬짬이 바르라고.


이 크림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다음 날 나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그 핸드크림 하나만 잠바 주머니에 덜렁 넣고 입대했다. 그 해 1월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고, 하루 종일 눈을 치우고 언 땅 위에 훈련을 하고 나면 손가락뿐 아니라 발가락도 나무껍질처럼 갈라져 매일 같이 피가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호호 입김을 불어 손을 녹이고 누나가 준 핸드크림을 바르곤 했다.


 그렇게 6주 동안 항상, 매일 맡았던 그 핸드크림 향은 당시 훈련소의 경험과 어우러져 하나의 회상 덩어리로 남았는데,


 새벽 폭설로 자다 일어나 연병장에 쌓인 눈을 치우고 내무실로 돌아와 바르던 핸드크림. 소대 전체가 5분 안에 씻어야 했던 전쟁 같은 샤워 후 바르던 핸드크림. 철조망 밑을 포복으로 박박 기고 고지에 올라 또 바르던 그 핸드크림. 이렇게 내 훈련병 시절 내내 붙어있었다.


 난 물론 그 이후로 니베아 핸드크림을 사서 쓴 적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 사무실에서 핸드크림을 바르고 있으면 다른 건 몰라도 니베아 핸드크림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이코메트리가 된 것처럼 2004년 1월 훈련소의 기억이 떠오른다.




오감으로 경험한 것은 기억 깊이 새겨진다.


 "오감으로 경험한 것은 기억 깊이 새겨진다."


 시각 경험은 흔하지만 그것이 기억 자체인 경우가 많다. 반면에 후각을 포함한 다른 감각들은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라 그 자체가 기억으로 잘 승화되진 않지만 미래의 어느 날 문득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단서가 된다.


 길을 가다 우연히 어떤 피아노 선율을 들었을 때, 타국의 허름한 식당에서 낯선 음식을 맛봤을 때, 시장 좌판에 걸린 털실 목도리를 만져볼 때, 그리고 나처럼 책장을 넘기다 익숙한 향기를 맡았을 때 숨어 있는 기억과 조우하게 해주는 통로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감각의 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꾸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