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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l 03. 2017

우연 혹은 필연

운명의 톱니바퀴 중 단 하나만 엇갈렸더라면


 지난 주말에 부모님 댁에 놀러 가서 어릴 때 추억을 곱씹어볼 겸 부모님과 동네 드라이브를 나갔다. 동네 뒷산 입구를 지나 곧 철거 예정인 주공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가자 엄마 왈,

 

 "87년에 이 동네에 이사오려고 집 알아보는데 처음에는 이 아파트를 알아봤었어.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가 아파트 단지는 너무 답답하다며 마당도 있는 단독주택이 더 좋지 않겠냐고 하셔서 옛날 우리 살던 2층짜리 양옥집을 샀지. 그땐 아파트가 이렇게 오를 줄 몰랐어."


 "그럼 나랑 제형이(동생)가 다녔을 학교들도 다 달라졌었겠네요?"


 그러자 뒤에 타고 있던 아내가 거든다.


 "오빠 파워애드(아내와 내가 활동하던 대학연합동아리) 혜정 언니 소개 받고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어? 아파트 살아서 다른 고등학교 다녔으면 우리 못 만났겠네~"


 그리고 엄마의 깔끔한 정리 멘트,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쁜 며느리 얻으려고 30년 전에 아파트로 안 가고 양옥집에 자리 잡았나 보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인생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어 시간에 불과한 러닝타임에 압축하여,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 마치 20세기 전체를 다 살다 나온 것 같은 장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필연과 우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운명'에 대해 벤자민이 독백하는 바로 이 장면이었다. (동영상)



 벤자민의 연인이던 무용수 데이지는 발레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더 이상 발레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연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병원 대기실에서 벤자민은 이렇게 상상한다.


단 한 가지만 달랐더라면...


 "친구의 신발끈이 끊어지지 않아 데이지가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트럭이 길을 막지 않았거나, 택시 기사가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거나, 택시에 부딪힐뻔한 남자가 제때 알람을 맞춰서 늦잠 자지 않았거나, 가게 점원이 전 날 애인에게 실연당하지 않아 물건 포장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면, 데이지와 친구는 길을 건너고, 택시는 그냥 지나갔겠지."


 영화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를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녹여 보여준다. 인간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무수히 많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개인의 인생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예측하지 못한 행운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동생은 그 아파트 단지 끝에 붙어있는 사립 남고로 배정받았지만, 나는 동네 뒷산에 터 잡은 공립 남녀공학에 다녔다. 이 학교에서 우연히 방송반 결원이 생겨서 운 좋게 들어가게 되었고, 졸업 직전 만들어진 술자리에서 혜정 선배가 활동하는 동아리 임원 명함을 받았다. 단지 그 명함이 갖고 싶어서 그 동아리에 지원했는데, 거기서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됐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할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아내가 한참 뒤에 우리 동네로 이사 오면서 친해졌고, 그러다 또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연인으로 발전하여 결혼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눈 앞에 펼쳐진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의 길로 들어서는 일의 연속이다. 그것이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든 아니든 집어 들게 된 단 하나의 선택지는 고작 우연에 불과하지만,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여러 개의 시계 톱니바퀴처럼 그중 하나만 틀어졌어도 지금 나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30년 전 우리 가족이 아파트에 입주했다면,
 동생처럼 나도 사립 남고에 배정받았다면,
 방송반 지원을 권유한 같은 반 친구에게 "No"라고 대답했다면,
 그래서 그날 술자리에서 혜정 선배의 명함을 못 받았다면,
 동아리 오디션이 있던 날, 학교 친구들과 서울대공원에 놀러 나가는 걸 택했더라면,
 아니면 아내가 우리 동네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 갔더라면,


 어땠을까 오늘 내 삶의 모습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순간은 나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며, 모든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가볍게 지나치는 모든 '우연'의 순간은 사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정교하게 짜 맞춰진 '필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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