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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an 25. 2017

꿈꾸는 여행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넘어



그 천장화를 그린 화가가 미켈란젤로였던가


 바티칸 시스타나 대성당에 가면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여행객들이 아침 일찍부터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6년 2월 18일. 드디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천지창조>가 있는 시스타나 소성당 경내에 드디어 입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채 3분도 안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세 시간의 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


다들 손가락을 맞대는 신과 아담의 모습을 상상했겠지만, 실제로는 이런 모습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고, '블로그'라는 말도 흔치 않던 10여 년 전에 배낭여행을 갈라하면 미리 모든 준비를 하고 떠나야 했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든 여행 카페에서 프린트한 정보와,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여행 책자를 짊어진 채 지도를 들여다보며 숙소를 찾는 한국 여행자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여행이라 하면, 남들이 다 가본 유명 여행지 - 파리의 에펠탑, 런던의 빅벤, 로마의 콜로세움 따위 - 에 들러서 셀카를 옴팡 찍고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무렵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은 저녁마다 배낭족들이 찍은 사진들을 CD로 굽는 모습이 장사진을 이루곤 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런 배낭족 중의 한 명이었다. 가이드북이 추천해 주는 경로를 오가며 남들이 다 가는 곳을 둘러보는. 해가 질 무렵 마지막 추천 명소에서 겨우 셀카 한 장을 건지고 막 떠나는 유레일에 올라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런 여행을 했었다. 사실, 시스타나 소성당에서 쫓겨난 것도 감시원 몰래 <천지창조>를 카메라에 담았다 걸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 유럽여행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반짝이던 에펠탑, 대영박물관의 수많은 유물들, 100년 넘게 건설 중이던 성가족 성당, 프라하의 야경이 아니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저녁, 역을 빠져나와 숙소로 가는 길에 마주친 것은 반쯤 파괴된 성당의 탑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입은 이 탑을 복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어 전쟁의 상흔을 시민들에게 노출하고 있었다. 20세기, 제국주의의 망령과 군국주의의 발자국이 한바탕 달려 나가고 세계가 동과 서로 나뉘어 총부리를 겨누며 끊임없이 증오를 양산하던 역사를 이 도시는 온몸으로 껴안고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에서는 국경을 넘기 위해 줄을 서있는 동독 시민들이 보이는 듯했고, 베를린 장벽의 잔해에서는 환희에 찬 사람들이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서 몇 장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몇십 년 시간을 뛰어넘어 그 앞에서 떠올렸던 잔상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쫓겨남을 무릅쓰고 카메라에 담았던 <천지창조> '직찍'은 그 후 11년 동안 열어본 적이 없다. 그 천장화를 그린 화가가 미켈란젤로였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던가.




'자뻑'의 요소가 다분한 오늘날 우리네 여행은 어떠한가.


 회사 도서관 서가에 꽂힌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을 읽으면서 '이런 기행문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97년 세계 각 곳을 도시면서 스스로 느낀 생각들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셨는데,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라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도시와 길에 뿌려진 민중의 역사와 자연의 가르침을 이야기하셨다.


 멕시코를 종단하며 서부 개발 시대의 아픔과 혼혈 문화의 부산물을, 히말라야의 민초들에게서 정복이 아닌 자연이 허락한 인간의 삶을, 교토에서 지역자립과 느림의 미학을, 그리고 무엇보다 놀랐던 점은 2017년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선생님의 20년 전 통찰이었다. 선생님이 세계를 돌며 우려했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와 초강대국의 제3세계를 향한 동이 부화(同而不和)의 노선은 지금도 큰 시사점을 남긴다.


 '자뻑'의 요소가 다분한 오늘날 우리네 여행은 어떠한가. 뜻도 모르는 명소 앞에서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 위시빈이나 옐프에 소개된 맛집에서 음식 사진을 올리고 그것이 힐링이고 깨달음이었다며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더 나아가 아이돌 그룹을 앞세워 물건 팔기에 급급한 한류 상품들은 여행객들에게 진짜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신 선생님이 타자의 입장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했었다면 어떤 생각과 그림을 남기셨을지 궁금하다.


결국 지구 상의 모든 땅이 스러져간 이, 현재 숨쉬는 이, 앞으로 걸어갈 이 모두가 함께 걷는 길이다.




 4년 전, 쿠바에 갔을 때였다. '낯선 세계에 대한 판타지' 말고는 별다른 목적이 없었고(물론 서른 살 생일을 쿠바에서 맞겠다는 오래된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다.), 살사를 배우고 시가도 피워보며 이국적인 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다 온 게 전부였던 보통의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이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생겨난 호기심에 '체 게바라'의 평전을 뒤적여보고, 그의 인생을 담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를 찾아 보고, 피델 카스트로가 표지를 장식한 타임지 기사를 시간을 들여 영어 원문을 읽어보며 거꾸로 배경지식을 쌓았다. 그때마다 아바나 골목에 걸려있던 서민들의 빨래들과 폐허와 같던 구시가지의 모습이 어우러져 하나의 재구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곤 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의 도시 아바나


 언젠가 이러한 경험의 축적으로 신 선생님 같은 여행기를 한번 써보고 싶다. '여기에는 이 식당이 맛있고, 어느 숙소가 좋고 어디가 뷰가 끝내주더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현시대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나의 영감과 감상이 곁들여진 여행기. 그러려면 더 많은 공부와 깨닫는 연습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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