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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an 25. 2017

연예인 추억

시련에 단련된 탄탄한 배우 이야기



그는 매주, 횃불을 들고뛰어나오는 역할을 했다.


 국민학교 2학년이던 1991년, '기쁨 주고 사랑받는' 서울방송 SBS가 개국했다. KBS와 MBC(당시 EBS는 KBS3) 밖에 없던 시절, 민영방송이 하나 더 생겨났다는 것은 볼거리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SBS는 KBS나 MBC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선진적인 예능이 많았고, 종래 로봇과 공주풍 일색인 외화 만화를 <피구왕 통키>와 같이 스포츠 영역까지 확대하면서 우리 또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초기에는 서울지역에만 시청 가능했기 때문에, 지방 사는 친구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선진 문물'을 접한다는 일종의 얄팍한 자부심까지 선사해 주었다.  


 또한, SBS는 KBS와 MBC에서 많은 연기자와 예능인을 포섭하는 한편, 신인들을 발굴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일요일 저녁에 방영했던 <열려라 웃음천국>이라는 버라이어티 쇼를 통해 많은 신인 개그맨들이 등장했다. 우리에게 '틴틴파이브'로 잘 알려져 있는 홍록기나 표인봉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충 이런 사람들이 나왔던 <열려라 웃음천국>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구라' 역시 당시 '김현동'이라는 본명으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그가 선보였던 개그나 유행어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김구라가 방송에서 말하는 동현이 낳고 셋방살이했던 어려운 시절이 바로 이 무렵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말하려는 이 인물도 SBS에서 성공하지 못한 개그맨,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매주, 이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횃불을 들고뛰어나오는(아마 그의 이름 때문이었을 수도) 역할을 맡았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러닝셔츠에 쇼트 팬츠를 입고 그는 열심히 횃불을 들고 등장하여 10초도 안되어 다시 들어가곤 했다. 제대로 된 대사 한 번 치지 못한 채.


 그 이후로 그는 개그맨으로 성공하지 못한 듯했다. 대신, SBS에서 방영하는 다른 버라이어티 쇼에 가끔씩 재연배우로 나오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마스크는 개그맨을 하기엔 잘생긴 편이었고, 목소리도 꽤 좋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개그맨보다는 조연 배우 역할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그리고 그는 1999년쯤, 카이스트를 배경으로 한 청춘드라마에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고는 한 동안 TV에 보이지 않았다. 연기자로 빛을 보내 했었는데... 그렇게 그의 횃불도, 재연배우 이미지도 점점 내 머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 배우는 성량이 안정적이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2007년쯤의 일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놀고 있을 때, 친한 누나가 뮤지컬 단체 표를 구했다며 연락이 왔다. 공연 이름은 <맨 오브 라만차>,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극화 한 라이선스 공연이었다. 한참 뮤지컬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주인공으로 '조승우'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는 뉴스가 검색되었다.


 "조승우가 출연하는 회차야?"

 "아니, 조승우 꺼는 만석이라 우리는 다른 분이 하시는 걸 볼 거야."


당시 최고의 인기 뮤지컬 배우 <맨 오브 라만차> 열연 중


 역삼동 LG문화센터 공연장은 꽤 컸다. 그만큼 빈자리도 듬성듬성 보였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우리는 포토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주인공 포토월에 오늘 만날 주연배우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랬다. 그는 15년 전 <열려라 웃음천국>에서 쇼트 팬츠 차림에 횃불을 들고뛰던 그 청년이었던 것이었다.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조승우는 가끔 삑사리 날까 봐 조마조마한데, 이 배우는 성량이 안정적이네~!"라는 옆자리 아줌마의 말처럼 누가 봐도 손색없는 프로 뮤지컬 배우였다. 물론 공연 내내 계속 횃불 든 청년이 생각나서 온전히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언제 이렇게 전업(?)을 했을까.'하는 배신감마저 안겼지만, 어쨌든 그 날 그가 보여준 임팩트는 대단했다.


 그는 그 이후로도 꾸준히 뮤지컬에 출연했다. 그리고 해마다 봄이면 열리는 뮤지컬 대상 시상식에도 그의 이름이 항상 거론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를 볼 때마다 횃불 청년을 떠올렸지만, 이제 그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작년 5월, 국립극장에서 그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영웅>을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와 함께 보러 갔다. 이제 횃불 청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그가, 결연한 애국자 '안중근'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마지막에,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가 반드시 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이라 외치며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그의 연기에 난 눈물을 흘렸다. 90년대 무명 개그맨이었던 20대의 그가 매일 밤하늘에 빌었던 기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의 인생과 극 중 대사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순간이었다. 개그로 웃기지는 못했지만 관객을 울리는 그는 이제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컬 배우인 것이다.



"난 왜 항상 횃불만 들지?"


 아마, 기억할 것이다. 2011년에 개봉한 <위험한 상견례>에서 극 중 이시영의 철없는 오빠로 출연했던 그를. 소녀 만화 캐릭터를 좋아하는 지질한 노총각을 연기하며, 그는


 "내 몸엔 아직 희극인의 피가 남아있어!"


 라는 메시지를 유감없이 발휘해주었는데, 덕분에 횃불 청년의 모습이 다시 한번 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이 그림, 내가 그린 기다!!!!"


"왜 나는 남들처럼 중요한 배역을 맡지 못할까."
"난 왜 항상 횃불만 들지?"
"나도 남들처럼 웃길 수 있는데"


 이런 무명 시절의 아픔이 그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냉정한 세상은 그가 진정 개그를 하고 싶을 때 기회를 주지 않고, 뮤지컬 배우로 유명해진 이후에야 웃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조금 씁쓸한 대목이다. 그래도 그가 웃음만이 아니라 인생의 희로애락 모두를 담을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한 것은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그의 연기와 노래에 오랫동안 웃고, 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 그가 무명 시절 매주 들고뛰었던 것은 사실 횃불이 아니라 성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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