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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Apr 05. 2017

'빌리 엘리엇'을 구해줘

좋은 사회는 한 아이의 재능도 귀하게 여기는 사회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엇>의 주인공 '빌리'는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의 한 탄광촌에서 하루에 50펜스의 수업료를 내고 권투를 배우는 11살 소년이다. 어느 날 권투 레슨이 끝나고 이어지는 발레 수업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홀린 듯 춤의 매력에 끌리게 되고 급기야는 아버지 몰래 권투 대신 여자 아이들 틈에 끼어 발레를 배우게 된다.


 제대로 된 시설도 없이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발레 선생님은 빌리에게서 숨은 천재성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완고하던 빌리의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런던에 있는 '로열 발레스쿨'에 입학해서 빌리의 천재성을 발굴하라고.


 때는 1984년, 대처 수상이 집권하던 신자유주의 시대 영국이었고, '발레리노'라는 직업은 영국인들에게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정부에 맞서 파업 투쟁을 하느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기에 빌리가 운 좋게 '로열 발레스쿨'에 합격하더라도 한 해에 5,000파운드나 드는 학비는커녕 수중엔 오디션을 보러 런던에 갈 왕복 기차표 40파운드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파업을 주동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위해 동료들에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다시 탄광으로 돌아가고, 그 비장하고 우울한 끝 장면을 마지막으로 <빌리 엘리엇>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빌리가 '로열 발레스쿨'에 합격했는지, 합격했다면 무사히 학교를 마쳤는지, 훌륭한 발레리노가 되었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형처럼 광부가 되었는지 이 작품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던 건, '로열 발레스쿨'에 합격했더라도 빌리가 쉽게 학교를 마치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오디션 장에 도착했을 때 빌리 부자와 나란히 순서를 기다리던 귀티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서 극명히 드러나는데, 높은 수준의 예술 교육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일정 수준의 경제력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슬픈 대비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천재성의 발굴은 개인의 의지와 부모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한석봉의 어미가 그리했고, 어릴 때부터 좋은 선생님을 수소문하고 연주 여행에 동행하며 뒷바라지하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부모가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예술가를 배출하는 것은 한 가정이 오롯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큰 사업이다. 이는 중산층 이상에 속하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데, 김연아의 언니도 미술인가 어딘가에 재능을 보였지만 피겨에 천재성을 보이는 김연아에게 올인하느라고 투자해주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회고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 수학에 잠재력이 있는 아이와, 음악에 잠재력을 가진 다른 아이가 있다. 수학의 경우 제도권 교육을 통해 재능이 발견될 여지가 분명하고, 설령 공학이나 이학이 아닌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동안 쌓은 수학 실력이 아이의 장래에 플러스가 될 여지가 농후하다. 하지만 음악의 경우 공교육을 통해 재능이 드러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대부분 부모에 의해 우연히 시작한 사교육에 의해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입시에 전념하기 위해 스스로 중단하고, 일부는 레벨이 오를수록 급격히 상승하는 사교육비의 허들에 걸려 넘어진다. 그렇게 하여 음대에 진학하는 학생 수는 또래 인구 대비 그리 많지 않으며, 그들은 어려서부터 거르고 걸러서 선택받은 영재들이라기보다 '입문 시기', '본인의 꾸준한 흥미', '부모의 경제력', '평균 이상의 재능과 노력' 등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맞아떨어져 여기에 이르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여기 100명의 학생이 있다. 이들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한다고 했을 때, 100명 모두 수학을 배우게 되고, 여기서 드러난 천재 1명은 향후 공학 발전을 위해 정말 국가가 나서서 육성해야 할 수학 천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100명 중 30명 정도가 어려서 기악이나 성악 등 음악에 입문할 때, 20명은 다른 진로 선택이나 흥미 부족으로 중도에 그만두고, 5명은 부족한 경제력으로 포기하고, 나머지 5명만 음대에 진학하여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면, 그 다섯 명 가장 뛰어난 한 명은 진짜 천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흥미 부족으로 그만둔 20명을 제외한 나머지 75명은 소질 계발의 기회를 처음부터 접하지 못했거나, 외부의 영향으로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 중에 묻힌 진짜 원석이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기술이나 학문과 달리, 예술은 어느 정도 선천적인 재능을 갖추지 않으면 노력만으로 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공공의 노력을 통해 아이들이 행여 놓치고 흘려버리는 재능이 없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좋은 사회는 한 아이의 재능도 귀하게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재능도 귀하게 여기는 사회이다.

 따라서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아래 두 가지 관점에서 대중적이고 실제적인 예술 교육이 공교육의 영역으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① 모든 아이들이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부담 없이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② 큰 가계 부담으로 작용하는 엘리트 예술 교육을 공공의 영역으로 흡수한다.


 첫째, 일선 초중학교에서 선택형 예술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일률적인 음악 교육만이 가능할 것이므로, 예술 과목은 학교가 아닌 지역사회 커뮤니티 센터에서 학점 은행제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커뮤니티 센터에서 연기, 현대무용, 발레, 유화, 판소리, 현악기 등 다양한 과목들이 개설되며 개인의 관심도에 따라 하나 이상 선택이 가능하다. (모든 아이들이 매주 클래식 음악과 수채화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이 필요하다면 감상 위주의 최소한의 수업만 학교에서 진행하면 된다.)


 둘째, 커뮤니티 센터의 강사들은 일정한 자격 검증을 통해 채용되며, 소규모 학급을 운영한다.

 이 교사들의 역할은 평가가 아닌 <빌리 엘리엇>의 발레 선생님처럼 흥미를 북돋아주고, 사교육으로 익힌 기교가 아닌 천재성을 발굴하는 데 있다. 물론 천재성이 없는 다른 일반 학생들이 교양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예술교육도 병행한다. 이렇게 되면 예술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강사들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예술 계열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사람, 연예 기획사 연습생 출신, 무형 문화재 등 수입이 부족했던 다양한 예술 자원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부는 각 예술 분야의 고교, 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국립 예술원을 전국에 하나씩 설치한다. 그리고 일선 대학 교수 월급의 두 배를 주어 최고의 교수진을 확보한다.

 입학하는 학생에게 교육비는 전액 무료지만 사관학교처럼 졸업과 동시에 일자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정말 예술을 하고 싶은 소질을 가진 이들이 입학하는 곳이다. 커뮤니티 센터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은 중학교 3학년 중 예술적 창의성을 보이는 아이들을 학생과 부모의 동의 하에 이 학교에 추천한다. 교수진은 만들어진 기교보다 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면밀히 체크하여 입학 여부를 결정하며, 실제적인 엘리트 예술 교육은 이 학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이 학교와 관련된 입시부정과 각종 비리는 교육부 장관 또는 더 높은 직권으로 정기 감사를 진행하여 강도 높은 처벌을 집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예술을 하고 싶은 학생들을 위해 기존의 예술고등학교는 계속 운영한다.)


 넷째, 기업들의 후원이 절실하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비용이 뒤따른다. 법인세를 증액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나 자발적인 스폰서십에 대해서는 법인세 감면 등의 혜택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악기에 기업명을 명기하여 지원한다거나, 사업장 근처의 마을에 연습실을 지어주는 등의 현물 지원도 얼마든 수용 가능할 것이다.


 다섯째, 도서 지역에 대체복무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

 예술 계열의 전공자들이 군 복무를 할 때, 도서 지역의 커뮤니티 센터에 파견하여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성을 띠며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이러한 대체 복무 제도는 예술 전공자들에게 선호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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