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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Apr 07. 2017

호기심의 거세에 대하여

그렇게 질문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른이 된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은 세 살때이다. 만으로 세 살때가 아니고, 우리나이로 세 살. 엄마가 동생을 가진 무렵이었으니, 만으로는 두 살이 막 되었거나 그 전이었을 것이다. 곧 태어날 동생 때문에 할머니 댁에 잠시 유배 가야 했고, 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두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도록 내 짐을 싸고 계셨다. 당시 내 몸보다 훨씬 큰 이민가방을 꽉 채우고도,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하나라도 더 넣으시려 애쓰시던 할머니 모습. 이게 내 인생 첫 기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가지 포인트이다. 내가 만 두 살 무렵의 일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내가 (한국 나이로) 세 살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 그렇게 난 선천적으로 기억력과 지각력이 참 좋은 아이었다.

 삼십대 중반이 된 지금에도 난 기억력과 지각력이 좋은 편이다. 한 번 들은 누군가의 생일은 잊지 않고, 학교 다닐 때 배운 단편적인 지식들도 아직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지인들 사이에서 어떤 사실에 대한 논쟁이 붙을 때, 가령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해가 1995년이냐 96년이냐.’, ‘성수대교가 먼저 무너졌나, 아니면 삼풍백화점이 먼저 무너졌나.’ 네이버 검색 없이 대부분 맞추는 편이다.




 여섯 살이되던 해 어느 날 저녁에 구구단을 통째로 외워버렸는데, 그 전에는 “제린이가 참 똑똑하다.”라고 지인들이 칭찬하면 겸연쩍어했던 엄마가 그 이후로는 조금 욕심을 내기 시작하셨다. 일곱 살이 되자마자 엄마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대치동에 있는 어떤 영재어린이 학원이었다. 그곳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받았다. 퍼즐 여러 개를 가지고 선생님이 요구하는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주어진 짧은 글을 읽고 몇 가지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그리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엄마는 날 그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첫째로, 테스트 결과 내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천재 수준의 아이는 아니었고, 둘째로는 그 학원에 가려면 대치동으로 이사가야 하는데, 1989년 당시 대치동 아파트 시세는 30대 초중반의 젊은 부부가 감내하기에 이미 부담스런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그때를 회고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때 빚을 내서라도 대치동으로 가야 했어. 그랬으면 너도 제형이(동생)도 아마 더 좋은 학군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집 값이 더 많이 올랐을거고. 그 때 엄마 결심 설 수 있도록 테스트 좀 잘 보지 그랬니.”




 아무튼, 그 해 일반 유치원에 들어가 별 눈에 띄지 않게 지내다 그 다음해이던 1990년.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공부는 너무너무 쉬웠다. 첫 시험에서 올 백(전과목 만점)을 맞았다. 성적 발표날 담임선생님께서 날 호명해 일으켜 세우셨고, 반 친구들이 박수를 쳐줬다.

 어린 나이지만 '성취'라는 마약을 맛보니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과한 공부를 했다. 당시만해도 가끔 밤에 전기가 나가곤 했는데,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고서라도 책을 읽곤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엄마는 점점 기대감을 키워가셨다. 2학년에 올라간 첫 시험에서 전과목에서 4개를 틀렸을 때, 엄마는 '건방지게 시험을 치뤘다'며 눈물이 쏙 빠질때까지 혼내셨다. 다섯 과목에서 고작 네 개 틀렸을 뿐인데...

 그렇게 결과에 대해 엄격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아마 앎에 대한 가치를 높게 생각하셨으리라.

“선생님은 질문을 하는걸 좋아하셔. 모르는게 있으면 항상 여쭤보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해.”
“선생님이 뭔가 시키면 손을 들고 나서서 해. 적극적인 학생을 칭찬하실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반에 50명 가까이 되는 90년대 한국 학교는 아직 그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3, 4학년쯤 되자 나를 비난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요제린이 잘난 척 한다.”


 선생님들도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항상 좋아하시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가 하는 질문들이 꼭 일반적인 것들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낙하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하늘 높이 떨어지는 비를 맞으면 엄청 아파야 되는데 왜 별로 안 아프죠?”

 대충 이런 류의 질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중학교에 들어가서 이적의 어머니인 박혜란씨가 쓴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패닉>이 유명해지고, 동시에 이적이 서울대생이라는게 화제가 되고, 알고 봤더니 이적의 형과 동생도 서울대생이라더라.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성장기를 써 내셨다.

 아무튼 그 책에서 이적의 형인 이동훈씨가 나와 유사한 경험을 했던 내용이 나온다. “학교에서 모르는게 있으면 꼭 알고 넘어가야 해. 몰라도 아는 척 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라며 우리 엄마와 비슷하게 아이들을 가르쳤던 이적의 어머니.

 그러나 엄마가 시키는대로 했던 당시 국민학교 2학년짜리 이적의 형은 학교에서 울면서 돌아왔다고 한다. 산수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아 질문을 했더니, 선생님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설명하셨고,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니, 선생님은 화를 내며 교실에서 나가라고 했단다.




 지금은 학교 교육 환경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아이들의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과는 먼 시스템이었다. 자유로운 토론은커녕 발표와 질문도 금기시되는 분위기에서 나는 그렇게 학교를 다녔고 하루 종일 교실에서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 혼자 공부했다. 한창 상상력을 키우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다양한 생각을 해야 할 나이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그 틀을 깰 용기가 없었기에 결국 그럭저럭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점차 범인(凡人)으로 성장해 나갔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어릴 때 학교 공부에 두각을 드러낸 탓에 ‘난 반드시 우등생이어야 해.’ 라는 강박관념이 내 안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공부능력 외에 다른 소질을 계발해줄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학교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엄마가 진짜 아쉬워해야 하는 사실은 대치동에 가지 못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치동에서 학교를 다녔더라도 호기심을 포용하지 못하는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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