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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Apr 10. 2017

소년들이여, 안전벨트를 매게.

포기할 수 없는 건 꿈이 아니라 한 소년, 소녀의 인생이다.


미안해


 '90년대 박진영은 제법 '생각 있는 날라리'라는 이미지를 가진 아티스트였다. 다소 파격적인 무대도 그다지 천박해 보이지 않았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하는 말들도 다소 급진적이긴 했지만 생각이 묻어나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그닥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의 그러한 면들 때문에 나는 그의 에세이집이 출간됐을 때, 서점에 가서 바로 사 읽었다.


"미안해"


 '미안해'는 그 에세이집의 제목이었다. 상반신을 탈의하고 그리 잘 생기지 않은 얼굴로 독자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이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꽤나 많은 부분에서 수긍을 했다. 다분히 자뻑의 요소(=나는 명문대를 졸업한 댄스 가수, 하지만 난 작곡과 편곡도 하지롱)도 있었고, 때로는 불편한 시각(=내가 페미니즘을 응원하는 건 여성들이 평등한 사회에서 보여줄 더 재밌는 일들을 기대하는 내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지롱) 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당시 열여덟이던 나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들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왜 자신이 종교를 버려야 했는지 꽤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했고, IMF의 사회 분위기 속 가수들의 방송 출연 규제에 반발하며, 사회가 어려울수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더 열심히 춤추고 신나게 노래해야 하는 것임을 소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에 들었던 글은 연예 지망생 아이들에게 학교에 계속 다니라고 촉구하는 그의 당부 말이었다.


 "요즘 가수가 되겠다며 학교 공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 친구들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계속 다녀야 한다. 이 길이 너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학교는 미래의 너희에게 안전벨트가 되어 줄 것이다."




 그 이후 현직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의 길을 걷는 박진영을 나는 응원했다. 많은 연습생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YG와는 달리 JYP의 가수들은 학업을 병행하며 연예활동을 계속했다. 구미에서 올라와 일산동고를 다니던 god의 김태우가 그러했고, 서산에서 어린 나이에 상경하여 창덕여고를 졸업한 별이 그랬다. 어려서부터 모델 활동을 했던 박지윤 역시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그들 모두 당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던 최고의 스타들이었음에도 그들은 모범적인 아이돌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의 주관을 에세이집에 뚜렷이 밝힌 박진영의 후원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수들의 연령은 더욱 낮아졌다. JYP의 가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량현량하와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를 차치하더라도 2007년에 데뷔한 원더걸스의 경우 선미, 소희, 현아는 데뷔 당시 중학생이었다. 'Tell me' 이후 한국에서 따라잡을 이 없이 독보적 인기를 구가하던 걸그룹 원더걸스는 돌연 2009년, 미국 진출을 이유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잠시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선미와 소희는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되는데, 나는 이 부분이 참 아쉬웠다. 물론 둘 모두 꿈을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10여 년 전 박진영이 자신의 책에서 밝혔던 소신과는 배치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둘은 나름 성공한 편에 속한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학력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예인이 되는 길은 여전히 엄청난 경쟁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아이돌 그룹들은 사실 몇 되지 않는다. 한 해에 수 십 팀의 그룹이 데뷔하는 상황에서 1집만 내고 제대로 된 생방송 무대에 서지 못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난주에 첫 방송된 <프로듀스 101 시즌2>에는 2012년에 플레디스에서 데뷔한 '뉴이스트'라는 4인조 그룹이 출연했다. "오죽했으면 연습생들이 출연하는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겠냐."는 그들의 말은 우리나라 연예 산업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5년만에 어렵게 방송 출연을 결심한 보이그룹 '뉴이스트'


 아직 변성기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아이들이 연예인의 꿈을 안고 연습생으로 입문하고, 그들이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는 기간은 어림잡아 4, 5년 이상, 그리고 운 좋게 데뷔할 기회를 얻더라도 성공에 대한 보장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그렇게 나이는 스물을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탈락한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는 누가 보장할 것인가.


 공교롭게 지난 주말에 SBS <K-pop Star> 최종회 역시 방송됐다. 우승자가 발표되고 나서 심사위원 박진영이 한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너무 아픈 이야기지만 지난 6년간 <K-pop Star> 우승자 중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정규 교육을 똑바로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꿈을 그리며 자기 세계를 펼쳤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진 모르겠지만 제발 이 한 명 한 명 특별한 사람들이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그렇게 커갈 수 있도록 어른들이 교육제도를 잘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분명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창의적인 아티스트를 육성하기에 현재의 교육 제도는 방해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건 왜일까. 내가 보기엔 꼭 우승자가 아니더라도 학교에 제대로 다니며 좋은 재능을 뽐낸 참가자들도 많았다고 기억하는데. 나에겐 그저 20년 전 자신의 언행에 모순되는 그간의 행보를 변명하는 것처럼만 들렸다.


 차라리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미안합니다.

아픈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 연예계는 학업과 아티스트의 길을 병행하기엔 너무 힘든 환경입니다. 우리의 교육 제도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에 미흡한 것도 사실이지만, 저도 연예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안해. 너무 많은 걸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줘서."


 아직 10대인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진정 키워주고자 한다면, 프로듀서로서의 박진영 씨는 그 아이들의 인생 전체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무대 위의 핑크빛 환상만이 아닌 냉혹한 경쟁 뒤에 패배도 있고, 때로는 재능이 없는 아이들에게 다시 모두가 뛰는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창의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좇다 넘어지더라도 평범하게 살아가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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