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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y 31. 2017

인연을 보내는 방법

찍어진 마침표를 애써 고쳐 쓰지 않는 것.


훈련병 정성철. 80년생 스물다섯 살입니다.


 85년생 스무 살부터 시작한 나이 조사는 81년생까지만 나이별로 부르고 나머지는 '그 이상'으로 퉁쳐 불렀다. 일흔두 명의 소대 훈련병 중 손을 든 사람은 그 하나였다.

 성철이 형은 내 맞은편 침상을 배정받았다. 저녁 점호 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유독 하얀 얼굴에 콧수염이 거뭇거뭇했기에 누가 봐도 나이 든 훈련병인 것이 티가 났다. 하지만 똑같은 옷을 입혀 놓고 똑같은 밥을 먹이니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격 훈련 때, 자기가 맞춘 표적지를 확인하고 영점을 잡았다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좋다고 뛰어오던 모습, 그리고 점심식사 입장하며 "오늘 군대리아(군대에서 배식하는 햄버거), 군대리아!"하며 들뜬 목소리로 내게 귓속말하던 그의 천진난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퇴소는 꿈이요. 전역은 전설이다.'

 6주의 훈련소 기간을 마치고 나는 사단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보병대대에 배치되었고, 그는 사단 직할 공병대대에 남았다. 퇴소할 때는 다들 정들어서 백일 휴가 나오면 싸이클럽을 만드니 어쩌니 했지만 다들 자대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훈련소 때 일은 차츰 잊어갔다.




 "요제린 병장이 훈련소 동긴데 이 대대 2중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역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부대 강당 공사 때문에 형은 우리 부대로 파견을 나왔다. 행보관은 자리가 여유로운 다른 내무실에 머물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굳이 거의 정원이 꽉 찬 우리 내무실을 택했다.

 "형 건대 다니니까 전역하면 연락해. 인식이랑 영일이도 사단 직할대에서 자주 보니까 같이 보자. 말년에 건강 조심하고."

 그래, 꼭 연락할게요 형. 하며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전역 후의 삶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훈련소 퇴소하고 자대에 배치받았을 때처럼 사회에 적응하느라 군대에서의 추억은 잘 떠올릴 일이 없었다. 자대에서 만나 2년간 동고동락한 동기들조차 몇 년 지나 거의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얼마 전, 처조카를 데리고 시내 큰 쇼핑몰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갔다. 5월의 휴일이었고, 몰은 아이들과 함께 음악회에 가는 가족들로 붐볐다. 그리고 음악회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마주쳤다.

 십 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하얀 얼굴에 콧수염, 큰 키에 굵은 목소리. 아내와 유치원생 또래의 아들과 딸. 십 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잠깐 스치는 눈빛 속에 그도 나를 알아본 듯했다.

 그의 가족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 아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칭얼거리자 그는 아이를 들춰 업고 자리를 떴다.

 마주친 장소가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면, 주변에 가족들이 없었더라면, 혹은 지금이 2017년이 아니라 2009년이나 10년쯤이었다면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많이 흘렀고, 13년 전 겨울, 훈련소에서 몇 주 함께한 추억만으로 반가워하기에는 세월에 마모된 둘 사이의 교집합이 너무 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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