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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n 02. 2017

Parental advisory

감출수록 본질을 놓친다.


 고등학교 방송반 시절, PD건 엔지니어건 아나운서 건 공통으로 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선배들이 지정하는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일도 그중에 하나였는데, 우리 기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감상문을 써냈고, 후배들에게는 로댕과 그의 뮤즈의 이야기를 담은 <까미유 끌로델>을 내주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죽은 시인의 사회>는 개봉 당시 권위적인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중고등학생에게 보여주기가 께름칙하였었고, <까미유 끌로델>은 스승과 제자의 정사 장면을 미성년자에게 공개하기가 부담스러웠으리라 추측해본다.


 선배님, 비디오 가게에서 빌리기가 너무 어려워요.


 후배들이 영화를 구해 보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왔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내용이 선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인 줄 알면서도 비디오 가게 주인들이 별 말없이 빌려주기도 했지만 야한 장면이 다수 포함되었던 <까미유 끌로델>은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한 살이나마 더 많고 어릴 때부터 노안이었던 내가 나서 비디오를 빌렸고, 토요일 오후, 방과 후에 후배들과 방송실에서 이 영화를 시청했다.


"똑똑"


 한참 영화가 상영되던 중에 젊은 영어 선생님이 방송실 문을 두드렸다. 문제아가 많은 남자 문과반 수업에서도 꿋꿋하게 아이들에게 할 말 하던 깐깐한 여선생님이었다.


 "수업에 쓸 테이프를 복사하러 왔는데... 근데 너희들 뭐 보고 있는 거니?"


 대낮에 남녀 학생들이 모여 커튼을 친 채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있던 것을 목격한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 모셔 올게."라며 방송실을 나갔고, 곧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한문 선생님이 오셨다.


 그 날 나는 교무실에 불려 가 꽤나 긴 훈계를 들어야 했다.


몇 대 맞을래?


 선생님과 몇 마디 이야기가 오갔지만 자세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름 내 입장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하셨고, 어쨌거나 빨간 라벨이 붙은 비디오를 학교에서, 그것도 선생님들 몰래 본 것은 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앞에 언급한 두 영화는 이제 각각 12세, 15세 관람가로 하향 조정되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사상에 대한 자율성을 존중하고, 맥락상 꼭 필요한 선정적 표현을 인정했으며, 지금의 청소년들 역시 우리 세대보다 더 많은 문화를 접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협소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진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사이, 어젯밤에는 중학생 시절 개봉한 <마리아와 여인숙>이라는 영화를 20년 만에 다시 봤다. 개봉 당시 신문 하단에 실린 포스터는 다소 파격적인 문구와 이미지를 싣고 있었기 때문에 혈기왕성한 중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어느 날 결국,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 집에서 야한 장면만 돌려서 숨을 죽이며 봤던 기억이 있다. 삐걱거리는 철 침대 위에서 헐떡이던 이름 모를 남녀와 창고 안 밀짚 위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던 남녀 주인공. 이게 내가 기억하는 이 영화의 전부였다. 하지만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이 영화는 나름 탄탄한 스토리와 함께 연기자들의 내적 심리 묘사가 뛰어난 영화였다. 특히 99년 개봉한 <쉬리> 이전의 한국영화는 투자도 제대로 되지 않아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극찬할만한 작품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낱 중학생들의 호기심만 자극하는 '야한 영화'로 폄하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다.


 교무실로 따라오라던 선생님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빨간 라벨이 붙은 영화는 다 야하고 학생들의 탈선을 조장하는 것들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꼭꼭 감추고 봉인했던 것들이 외려 좋은 작품들을 음성화하고 선정적인 잣대로 보게 하여 더 야릇한 호기심을 자극했으리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에이 별 것 없구먼


 <까미유 끌로델>을 끝까지 봤을 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마 그 일이 없었다면 스토리에 집중해서 봤을 작품을 "뭐가 있길래 못 보게 하는 거야?"라는 호기심에 오히려 그런 쪽에만 집중해서 보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작품을 만들던 와중에 격정적으로 서로 키스하며 사랑을 나누던 로댕과 까미유의 모습이 떠오르지 주인공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나 감독의 연출력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영화도 다시 봐야겠다 싶었다. 어젯밤 <마리아와 여인숙>을 보며 느꼈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사춘기 소년의 관능적 판타지만을 쥐고 흔드는 영화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마 다시금 깨닫게 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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