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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l 28. 2017

꿈 많던 소년아, 너는 어디에.

어느 비오는 출근 길에서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려 출근하기 싫었다.


 밤을 뒤덮은 열대야에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며 잠을 설친 내 어깨의 피로만큼이나 습기를 머금은 아침 공기 역시 무겁다. 비를 뚫고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해 우산에 쌓인 물기를 털어낸다. 이미 바지 밑단은 비에 젖어 정강이에 찰싹 붙었다.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내는 복사열 때문인지 한 여름 지하철 안은 비가 오는 날도 후텁지근하다.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비인지 땀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을 우산을 쥔 반대쪽 손등으로 씻어내며, 그새 헝클어진 앞머리 몇 가닥을 뒤로 넘긴다.


 문득 학교 다닐 때처럼 방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놀러 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제도 쉬고, 어제도 쉬고, 오늘도 쉬었는데, 내일도 모레도 쉰다는 그런 여유만으로 포만감이 느껴지는 그런 방학. 떠올려 보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꼬박꼬박 주어지던 수십 일 간의 방학이 직장인이 되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응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신기할 정도다.




 합정역에 이르러 자리가 하나 났다. 땀과 비에 젖어 다리에 붙은 바지를 손으로 떼어내고, 이어폰을 꽂고 열차 유리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는다. 19년 전,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의 내가 지하철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고등학교 진학 서류 내려면 미리 방학 때 봉사활동 시간 채우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봉사활동 가는 길이였겠지. 학기 중에는 지하철 탈 일이 거의 없었을 테니.


 녀석은 앞자리에 앉은 내가 미래의 자신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AIWA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옆구리에 낀 책을 펼친다. <고교 독서평설>, 1998년 8월호. 기획기사 ‘학과탐방, OO대학교 OO학과를 찾아서.’ 좁디좁은 승객 사이를 꾸역꾸역 파고들어 잡상인 하나가 칫솔을 팔고 있지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음량이 커서인지 아니면 책에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녀석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래, 저 즈음엔 꿈을 키우고, 4년 후 마침내 저 학과에 입학하지. 좋은 시절이었어.’


 돌이켜보면 밤하늘의 샛별처럼 영롱한 꿈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한 차례 비가 내리면 쑥쑥 자라는 대나무처럼 분명 나는 살아있는 생물이었다. 평생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삶은 영원할 것 같았고, 인생은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었다. 하루키 신작 소설에 나오는 대사처럼, 기억은 지나간 시간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기억은 불쑥 오늘 내 앞에 나타나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갔다.




 문득 고교 시절에 읽었던 <도박묵시록 카이지>라는 일본 만화가 떠올랐다. 작중 '타짜'인 주인공 카이지는 감당할 수 없는 도박빚을 진 나머지 막대한 채무를 갚기 위해 지하 탄광에 갇혀 강제 노역을 한다. 노동 강도에 비해 하찮은 보수, 하지만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절대 나올 수 없기에 쥐꼬리만 한 일당이지만 다시 세상에 나오려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


 그런 노동자들이 월급을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들 앞에 시원한 생맥주를 파는 스낵카가 지나간다. 처음에는 다들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지나치지만, 땅속 깊은 탄광 더운 열기와 주변 사람들의 목 넘김 소리를 들으며 '딱 한 번만'이라고 마음먹고 거의 한 달 월급에 일당에 맞먹는 맥주 한 캔과 안주를 주문한다.


...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탄광에서 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의지를 불태우지만
결국 시원한 아사히 맥주 한 캔에 영혼을 판다.


 조금 과장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직장인의 삶이 저 탄광 속의 카이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정작 매주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기 싫어 이불킥 하면서도 휴가와 황금연휴에 강박적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으로 위안을 삼는다. 비행기 삯과 면세점 쇼핑에 수입의 많은 부분을 털어 넣고도 "이런 게 인생이지.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아."하며 우리는 현재의 삶에 스스로를 길들여간다(나는 욜로족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능력 중 가장 쓸모 있으면서도 무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적응력 인지도 모른다.




 녀석은 아현역에서 책을 덮고 내렸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채색 표정을 한 채 일터로 실려가는 어른들을 보며 측은하다는 생각을 잠깐 품었던 것 같다. 아마 ‘난 저렇게 무기력하고 꿈 없는 어른이 되지는 않겠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수도.


 "꿈 많던 소년, 소녀여 너희는 다 어디로 갔느냐."


 이런 삶이 너희의 꿈은 아니었을진대. 몇 정거장 더 지나, 퇴근길 맥주 한잔과 다가올 여름휴가를 생각하며 오늘도 빌딩 숲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다. '출근은 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또 하고 나면 나름 견딜 만 해.'하고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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