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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l 15. 2017

아내에게 배운다

"밥 거르신 분들 그냥 보내는 거 아니야."


 지난 주말, 아내가 냉장고에 얼려놓은 쭈쭈바를 안고 자는 상황에 이르자, 다음 달 말에 가격이 떨어지면 구입하기로 한 에어컨을 바로 주문하기로 했다.

 맞벌이 부부라 낮에 집에 있을 수 없어 저녁 7시에 설치 예약을 부탁하고, 어제저녁 여섯 시 땡 치자마자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일곱 시 즈음 집에 도착해 베란다에 넣어 놓은 빨래를 치우고 설치기사님들께 방해되지 않도록 간단히 집 정리를 마쳤는데,

 일곱 시 반이 지나도록 설치 기사는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창문 밖 아파트 단지 안을 내려다보며 소형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의 주시했지만, 전화도 받지 않는 설치 기사는 나타나지 않고 야속하게도 해는 점점 저물어만 갔다.

 그리고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이윽고 전화벨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에어컨 배송이 늦어져서 연락이 늦었습니다. 지금 시간이 많이 늦어서 타공 작업을 하면 다른 주민들한테 민원이 들어올 수 있는데, 다른 날을 잡아서 설치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렇게 할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날을 잡기 어려울 것 같아 일단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민원 때문에 설치가 중단되더라도 다음에 부르시면 추가 비용 발생하세요. 제품 배송이 늦어진 게 고객님 탓은 아니지만 저희 탓도 아니잖아요."

 이 말에 화가 나서 전화를 붙잡고 조금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벌였다. 끊고 나니 더운 날씨에 기분도 안 좋고, 막상 와서 나에게 쌓인 악감정 때문에 제대로 설치해주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아직 회사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해서 의견을 구했더니, 아내의 대답,

 "오빠, 너무 화내지 마. 오늘처럼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에어컨 수리하고 설치하느라 그분들도 얼마나 힘들었겠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아내는 설치 기사들과 거의 동시에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인터폰을 들어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희 OOOO호인 데요. 오늘 저희가 에어컨 설치를 하는데 배송이 늦어져서 지금 시작할 거거든요. 혹시 민원이 들어오면 몇 호인지 적었다가 알려주시겠어요? 나중에 저희가 찾아뵙고 보상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기사님들은 생각 외로 친절했다. 자신들도 고객을 상대로 언쟁을 벌인 게 머쓱했는지 오히려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소나기가 내려 조금 젖은 모습과 저녁도 못 먹고 퇴근길에 들렀다는 말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치는 다행히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타공 마무리 즈음에 경비실에서 전화가 왔다. 민원이 몇 건 들어왔다는데 거의 다 끝났다고 하니 경비실 아저씨께서도 껄껄 웃으시며 자기가 잘 설명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단다.

 "엄마가 밥때 거르시고 일한 분들 그냥 보내는 거 아니랬어."

 라며 아내는 약정된 설치비에 2만 원을 더 얹어서 기사님들 손에 쥐어드린다.

 에어컨을 틀자 후텁지근한 공기를 내보내고 방 안이 금세 시원해졌다. 아마 나 혼자 설치 기사들을 맞았다면 기분이 상한 와중에 민원까지 들어와 다시 언쟁이 붙었었을 수도 있었겠지. 시원한 냉기에 몸은 이내 시원했졌지만 아내의 배려할 줄 아는 슬기로운 행동에 마음은 따뜻해지는 듯했다.

 오늘은 아내에게서 한 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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