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2화: Boy, tu n'es pas seul
오세운.
세운이의 존재는 2학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이 많이 들어간 갈색 안경을 쓰고 호리호리한 마른 몸매를 가진 세운이는 방과 후에 프랑스어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2학년이던 어느 날, 3학년 직업반 선배들의 성공사례를 교내방송에 내보낸 적이 있었다. 정규 학과 수업을 듣는 대신 열심히 일본어를 파고들어 경희대 수시모집에 합격한 한 여자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세운이는 프랑스어를 파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 당시에 학교에서 가르치던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을 뿐.)
3학년이 올라와 처음 짝이 된 세운이 책상에는 항상 두껍고 재미없게 생긴 프랑스어 문법책이 놓여 있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개인 신상을 적어내다가 서로 생일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몇 시에 태어났는지 물으며 형 동생을 가렸다.
"난 정오에 태어났으니 내가 여섯 시간 형이네?"
조폭처럼 무서운 선생님이 가르치는 국사 시간과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선생님이 있던 문법 시간, 그리고 선생님의 실력이 너무 탁월해서 지나칠 수 없었던 수학 시간을 빼고 세운이는 거의 불어 공부에만 매달렸다. 세운이를 아는 선생님들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고, 새 학기에 처음 만난 선생님들도 "니가 걔니?" 하면서 넘어가 주시곤 했다.
한편, 젊고 깐깐한 여선생님이 가르치던 프랑스어 시간은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최악이라고 꼽히는 '문과 프랑스어' 선택자는 두 개 반을 만들기 애매한 60명이었다. 각 반에서 모인 프랑스어 선택자들은 말 그대로 통제 불능.
"거기 무쓰유(monsieur)! 밖으로 나가요!"
"거기 마드모아젤(madmoiselle)! 핸드폰 집어넣어요!"
핏대를 세우며 어떻게든 수업을 이끌어보려던 선생님은 결국 포기하고 수능에 불어 시험을 본다는 세 명만 앉혀놓고 수업을 했다. 나머지는 자거나 떠들거나 자기 공부하거나.
하지만 고3에게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딴짓하느라 배운 게 없으니 나와 다른 아이들에게 프랑스어 시험은 난제 중에 난제였다. 시험을 보는 날 아침이면 아이들은 세운이 앞에 모여들었다.
"야 오세운, 이거 무슨 말이냐?"
"어 그건 오늘 날씨 존나 좋다."
"이거는?"
"소피는 아직 집에서 쳐 자고 있다."
만점자가 60명이 넘었던 이전 해와 달리, 그 해 수능은 유독 어려웠다. 수능 본 다음 날 등교하니 학교가 난리가 났다. 300점 넘은 애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나에게 각자 가채점한 점수를 받아 걷어오라고 하셨다.
"어? 생각보다 잘 봤는데?"
"프랑스어 포함이야. ㅋㅋㅋ 프랑스어는 만점."
그렇게 세운이는 싱긋 웃었다. 불어 특기자로 수시를 노려볼만했다지만 그러기에 최저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수능 점수가 너무 낮았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도 머쓱하게 씩 웃었다.
세운이는 그 해에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다. 이듬해 겨울,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바에 놀러 갔다가 세운이를 만났다. 그도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 경북대 불문과 수시 합격했어. 다음 달에 대구 내려갈 거야."
나는 그때서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꼭 성공하라고.
고등학교가 사회랑 닮아있는 점이 있다면, 내 걱정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떠먹여 주는 법이 없다. 학교는 단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한다. 학과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 그 외의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학교는 학과 성적 중간 정도였던 세운이 같은 수많은 아이들을 동시에 챙겨주지 못했다. 세운이가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학교는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를 수업시간에 건드리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도움을 준거라 해야 하나.
가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혼자 선택해서 묵묵히 가던 세운이가 생각난다. 옆에서 도와주는 선생님도,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없이 그 딱딱하고 어려운 프랑스어 문법을 혼자 소화하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이었을까. 어떤 분야든 깊게 파고드면 높아지는 난이도와 지지부진함에 포기하고 싶은 상황도 얼마든 찾아왔을 텐데, 세운이는 홀로 그 길을 묵묵히 갔다.
그 당시에도 그의 그 우직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도 그 친구의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떤 분야에 지속적으로 열정을 갖고 스스로의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운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