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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an 12. 2018

네가 알던 내가 아냐

고3. 3화: 진짜 내가 아닌, 남들이 그렇다고 믿는 나


 장현우.


 학교가 '공식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이 있다. 사회는 결코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학교가 가르쳐주는 대로라면 전교 1등이 가장 좋은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고, 가장 멋진 배우자와 결혼해야 한다. 물론 공부를 잘하고 순종적인 학생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확률은 높아지지만 이 명제는 언제나 참은 아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는 사회진출 관문까지만 유효할 뿐, 그 안에서 출세 여부까지 보장해주진 못한다.


 사회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겉보기에는 그저 그런 사람이 실제로는 속이 꽉 찬 진국이고, 반대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그 사람이 어떻냐'보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사람들이 믿는 이미지가 곧 그 사람이 되는 경우를 왕왕 목격한다.




 그는 나를 몰랐겠지만 나는 현우를 1학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현우는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1학년 봄, 음치인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는 TV 프로그램에 나가 'god'의 '어머님께'를 찢어지는 고음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야!이야아아아~~! 그렇게 살아가고오호오~!") 열창 후 MC 임창정과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게 자신의 가창력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현우는 방송에서 나중에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럼 미래의 아들 딸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물려주고 싶다는 말을 영어로 해보라는 임창정의 요청에,


 "I am so proud of my voice, and I will turn my voice to my children!"


 라고 전교생 앞에서 크게 외쳤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다른 반이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 지켜봤다.


 그리고 2학년 여름, 그는 전교권의 성적에 똑소리 나는 성격을 가진 여학생과 러닝메이트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착하고 깔끔해 보이는 인상에 중저음의 보이스. 준수한 외모에 신뢰감 주는 연설에 많은 학생들이 그들에게 표를 던졌고, 결국 압도적인 표 차이로 경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그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진 못했다.




 3학년에 올라와 같은 반이 되어 처음 알게 된 건 현우가 생각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총기가 없는 아이였다. '1, 2학년 학급 회장, 전교 부회장까지 하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두 번째로 알게 된 건, 현우가 골초였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당시 우리 반 흡연율이 60%에 육박했던 걸 감안하면 담배 피우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공식행사에 이리저리 다니면서 교장선생님이랑 악수도 하고 교무실 출입도 잦을 텐데 이렇게 담배 냄새가 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현우의 흡연량은 상당했다.


 그렇다면 현우를 학생대표로 밀어준 지지세력이라도 두터워야하는데 현우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같이 노는 친구들도 정말 학교에서 새끈하게 노는 애들이 아니라 좀 한심하다 싶은 한량들이었다.


 즉, 현우의 대외적 이미지에는 거품이 많이 끼어있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담임 선생님은 나를 에어컨 바로 밑에 있는 1분단 끝 구석 자리에 밀어 넣었다. 에어컨 바람을 시원하게 쐴 수 있는 내 자리 근처는 인기가 많았고 아이들이 늘 모였다.


 "어제 채팅으로 OO중학교 여자애 둘 꼬셔서 노래방 가서 술 마셨는데..."


 쉬는 시간, 그곳에서 현우의 얘기는 늘 이렇게 시작했다. 맑고 진중한 눈망울을 가진 그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신이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중학생들을 꼬셔서 밤새 놀았다는 현우의 무용담에 아이들은 항상 "아, 이 로리타 색마 새끼"하면서 낄낄거리며 재밌어했다.


 낮에는 음담패설을 하고 밤에는 술 마시고 놀러 다니면서도 녀석은 꾸준히 대학교 수시모집에 지원했다. 일반전형으로는 성적 허들에 걸리니 전교 부회장 경력을 내세울 수 있는 리더십 전형에 계속 도전했다. 구술면접을 보러 간다고 일주일에 한 번은 결석하던 녀석은 수십 장의 원서를 쓴 끝에 결국 수도권 모 대학의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어쩌면 반듯한 외모와 신뢰감 있는 말주변이 가장 강력한 장점이었던 그는 자기가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입시 전형을 택한 셈이었다.




 아마 현우에 대해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나는 현우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지도, 전교회장 선거에 뽑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우는 학기초 반듯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이미지로 처음 만난 학급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학교와 학급 임원에 계속 당선됐다. 어느 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낮은 현우의 영어 점수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너 1학년 때 방송에 나와서 한 영어 멘트는 뭐야?"

 "아, 그거 사전 인터뷰 때 미리 정하고 아는 형한테 부탁해서 달달 외운 거야."


 그는 이런 방향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였던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아이들은 그렇게 속았다.


 사실 고등학교 학급 임원이나 학교 임원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아이들도 기대하는 것이 없다. (누가 학생회장이 된다고 내 학교 생활이 바뀌겠는가. 옛다, 그나마 잘생기고 예쁜 니가 해라.) 이런 무관심은 현우처럼 이미지를 잘 쌓은 아이들이 감투를 쓸 수 있는 환경을 얼마든 제공한다.


 소수의 주변 아이들은 그의 진짜 모습을 알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를 스승의 날 교장, 교감 선생님과 구령대 위에 서서 기념 촬영하는 모습으로 만나볼 뿐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준수한 용모로 전교 부회장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진짜 모습이 어찌했던 그 모습을 본 대다수의 아이들은 아마도 공부 잘하고 리더십 있는 모범생을 연상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우리는 거의 격년에 한 번꼴로 선거를 치른다. 지자체나 국가처럼 큰 집단의 수장을 뽑는 일은 잘 모르는 타인을 나의 대표로 뽑는 일을 의미한다. 직접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는 이상, 몇 번의 선거 방송과 팸플릿으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결국 여러 가지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이미지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좋은 인상을 남긴 정치인들이 이미지로 살아남는다.


 그렇게 사회는 생각보다 빈 틈이 많은 곳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성공방정식이 희미하게 작용하는 현실 속에서, 처세와 이미지 메이킹은 이제 모든 현대인들에게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때로는 진실보다 대다수에 의해 믿어지고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본질보다는 외연이 더 치켜세워졌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앞서 그걸 보여준 현우는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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