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체실 비치에서>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있고, 저마다 관객의 마음속에 방점을 찍는 방식은 다르지만, 관객에 따라 다른 메시지와 울림을 주는 다소 불친절한 영화를 선호한다. 그래야 오랫동안 기억에도 남기 때문이다. <체실 비치에서>는 그런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영화가 아닌 내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최근 수 차례에 걸쳐 심리상담을 받았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좀처럼 잘 되지 않아 몇 달간 무기력하고 자신감도 많이 하락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첫 만남에서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주저리주저리 쏟아내는 나에게 상담 선생님은 조심스레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최근 부부생활에서 다툼이 조금 잦아지지는 않았나요?”
어, 난 회사생활에서의 고민을 말하러 왔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조금 돌이켜보니 그 말이 맞았다. 집에서 짜증이 늘기 시작했던 시기는 스스로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인지한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털고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에도 발끈하며 싸움으로 키웠고, 며칠 전 주말 밤에는 분에 못 이겨 새벽까지 바깥에서 식식거리다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이성을 차려보면 그렇게까지 화 낼 일은 아니었다. 울던 아내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던 반려 고양이의 잔상만이 고통스럽게 남았고, 그렇게 지난밤 나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했다.
마치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선생님의 인자한 표정.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자존감이 낮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외부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다 그것이 좌절되면 ‘욱’하는 성격으로 발전하기도 해요. 어른도 마찬가지예요. 긍정적인 자아가 있는 사람은 남들의 비난을 툭 튕겨버리죠.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욱’하는 성질을 드러냅니다. 들켰다고 생각하니까요. 어땠나요? 그렇게 화를 내고 나니까.”
*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는 1962년 영국, 막 결혼식을 올린 두 젊은 연인이 신혼여행지인 ‘체실 해변’의 호텔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마치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처럼, 첫 등장부터 무언가 결핍되고 세상 일에 서툰 그의 모습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호텔에 도착해 룸 서비스가 제공된 첫 장면에서부터 나는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런 특급 호텔에 묵어본 적이 없었는지 자신이 손님임에도 바짝 긴장하며, 팁을 주는 습관도 몸에 배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에드워드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듯 필요 이상으로 주눅이 든다. ‘혹시 내가 촌뜨기라고 비웃은 것은 아닐까.’
그때부터 에드워드는 혼란스러워하며, 아내인 '플로렌스'가 식사를 중단하고 산책을 제안했을 때도,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을 때도 욕설과 함께 역정을 내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러한 행동의 원인은 그의 회상 장면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사고로 뇌손상을 입어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 어머니, 그리고 가족 일에 비정하리만치 무심한 두 여동생. 에드워드는 학업에 두각을 보였지만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됐음에도 가족에게 축하받지 못한 그는 집을 뛰쳐나와 우연히 들어가게 된 봉사단체 행사에서 플로렌스를 처음 마주친다. “나 학사 최우등 졸업했어.”라고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이 생면부지 청년에게 플로렌스는 “그거 멋진데, 정말 축하해.”라고 인사를 건넸다. 가족들에게조차 얻지 못했던 인정을 처음 만난 또래 여성에게서 찾은 것이다.
플로렌스를 만난 후 그의 삶은 조금씩 변화해 간다. 플로렌스는 그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에드워드 어머니의 상처를 감싸 안고, 냉소적인 여동생들도 가족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한 에드워드와는 달리, 그녀는 그의 어두운 배경마저도 양지로 끌어내 그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도록 일조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에드워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쟤랑 결혼하거라.” 플로렌스는 결핍되고 어두운 청년 에드워드의 구원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고 싶었던 신혼여행 첫날, 한껏 경직된 에드워드의 자존심은 호텔 직원들의 비웃음과 뻑뻑한 드레스 지퍼에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비틀즈 멤버들도 아직 리버풀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60년대 초, 보수적인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남자 형제 없이 자라 제대로 된 성 지식 조차 없었던 플로렌스는 첫날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이는 이미 엉망이 된 에드워드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기어이 폭발하게 한다.
그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이해하고, 그의 가족의 아픔을 껴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플로렌스는 자신과 함께해줄 것을 간절히 바랐지만, 에드워드는 그 손을 끝내 잡지 않았다. 물론 그 손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에드워드는 알았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애써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는 듯 집에 돌아와 멀쩡한 척 살아간다.
하지만 13년 후, 자신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에 플로렌스의 딸이 찾아왔을 때도, 그리고 다시 32년이 흘러, 라디오에서 그녀의 고별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에드워드는 절대 태연하지 못하다. 그의 시간은 플로렌스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그 지점에 45년째 멈춰 있었던 것이다. 노인이 된 플로렌스는 대학시절 자신을 짝사랑하던 남자와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성장 과정에서 입은 에드워드의 상처를 플로렌스가 치유했던 것처럼, 플로렌스가 안고 있던 문제는 결국 사랑 안에서 극복 가능했던 것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진심도 아닌 즉흥적인 말을 뱉고, 또 그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말을 사과하지도, 번복하지 못하는 것은 ‘욱’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지도 되돌리지 못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상영관을 나서며, 아내가 물었다.
“뭐 느끼는 것 없어?”
나와 같은 시각에서 영화를 본 아내. 가까이에서 나를 관찰하는 아내의 시각에서도 자신감이 없고 심적으로 나약한 에드워드는 지금의 내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날을 세워 뱉어내는 말들은 자신을 높이지도 못하고 후회만 남긴다.
내 안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영화 한 편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내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고, 상담은 계속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런 내 나약함까지도 보듬어주고 손 내밀어주는 플로렌스 같은 아내가 있기 때문에 덜컹거릴지언정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다. 어찌 감사하지 아니한가. 앞으로 다시 즉흥적인 감정에 휩싸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금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보이는 것이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 역시 기억해야겠다. 나는 영화 속 에드워드와 많이 닮았지만, 45년 후 극장에서 후회의 눈물 흘리는 노년의 에드워드는 닮고 싶지 않으니까.
포스터 상단의 서브 카피가 이 영화의 여운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