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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n 19. 2017

24년 후

그녀는 그렇게 소실점 밖으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개나리반 담임 송영은입니다.


 회사 메일함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사내 어린이집 교사의 인사 메일이었다. 처음 부임이라 부족한 게 많지만 잘 부탁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언제든 연락해라, 다음 달 학부모 모임 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의 짧은 메일이었다. 새 학기 첫날 열한 명의 반 아이들과 찍은 단체 사진과 함께.
 
 '송영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하며 사진을 들여다본다. 길쭉한 얼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긋 웃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새침한 인상.
 
 “아, 송영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4년 전 봄, 일현 국민학교 5학년 6반 교실에서였다.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머리 하나 있을 정도로 큰 키, 조숙한 몸매에 청바지, 그리고 중학생처럼 자른 단발머리에 하얀 핀. 그게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신다면, 우리 5학년 6반이 SBS <점프점프 퀴즈>에 나갈 수 있도록 추진하겠습니다!”
 
 반장 선거 날, 그녀의 시원시원하고 야무진 공약에 아이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그녀는 결국 당당히 우리 반 여자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반장이 된 그녀는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선생님도 예뻐라 하셨고,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OO야, 미안한데, 학급문고 좀 정리해 줄래?"

 

 라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영은이가 부탁하면, "싫어, 니가 해."라고 말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카리스마가 있었고, 스스로 우두머리에 서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데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반 아이들도 때로는 그런 그녀를 동경하며, 그녀의 이너써클에 들어가길 희망했다.

 
 “SBS에서 일하시는 우리 아빠 친구분이 날 엄청 예뻐해 주시는데, 결국 내 소원을 들어주셨어. 내가 신청하면 우리 반 대표들이 <점프점프 퀴즈>에 나가게 해주신대~”
 
 토요일 학급 회의 말미에, 그녀는 공지사항을 전달하듯 뜬금없이 반말로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랑 같이 나가고 싶은 사람은 이따가 회의 시간 끝나고 나한테 신청해. 퀴즈 대회니까 기본 실력은 있어야겠지?”
 
 난 마음이 설렜다. <피구왕 통키>도 안 본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면, 바로 <점프점프 퀴즈>였다. 다섯 명이 한 팀을 짜 상대편과 퀴즈 대결을 벌이는데, 상대편이 정답을 모를 것 같으면 기회를 상대편에 토스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배팅할 수 있는 짜릿한 룰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 번 꼭 출연해서 내 퀴즈 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영은이 자리에 갔다.
 
 “저… 송영은…”
 
 이미 영은이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아빠 친구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너도 설마 <점프점프 퀴즈> 나가고 싶다고?”
 
 ‘끄덕끄덕'


 "하... 야, 니가 공부 좀 하는 건 알겠는데, 이거 방송이야. 방송으로 얼굴 나가는 거라고. 니가 나가면 전국에 시청자들이 우리 반을 뭐라고 생각하겠냐? 낄 데 껴야지 정말."


 그녀는 긴 다리를 꼰 채로 앉아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새침하게 그렇게 말했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날 쳐다봤고, 몇몇 여자아이들은 키득거렸다.
 
 “아... 마, 맞네. 내가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 미안. 헤헤”
 
 순간 아이들의 시선에 창피함이 몰려왔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무겁게 짓누르던 지독한 콤플렉스가 온몸에 힘을 빠지게 했다. 사실이었다. 발육이 늦어 2차 성징을 시작한 여자아이들보다 몸집도 작았고, 얼굴에 비해 큰 콧등 위에 걸친 두꺼운 돋보기 안경은 거울 앞에 선 나를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항상 남들 앞에서 자신감도 없고, 말도 더듬는 아이였다. 그런 내게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날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던 것이었다.




 "야, 안경진(내 이름은 ‘안성진’이다. 하지만 유난히 두꺼운 안경 때문에 아이들은 ‘안경진’이라고 불렀다.), 너 송영은 좋아하냐?”
 
 집에 가는 길에 우리 반 장난꾸러기 녀석 둘이 뒤에서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얌마, 너 아까 송영은이 뭐라고 할 때 그게 뭐냐. 화도 안나? 너 대놓고 못생겼다고 하는데 배시시 웃고. 너 송영은 좋아하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도 얼굴 빨개지는구먼. 에이~”
 
 차마 나 자신이 초라해서 그랬다고 고백하기에는 어린 나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니야. 아니라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송영은을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오해해서 눈물이 난 건지, 아니면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내가 미워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아니면 그토록 좋아했던 <점프점프 퀴즈>에 나가지 못해서 서운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녀석들은 내 눈물의 의미를 편한대로 해석해 놓고 다음 날 학교에 와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안성진, 송영은 좋아해서 울었다며.

 하루가 채 안되어 나는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시릴로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흰 장갑을 끼고 다니는 마리아 호와키나, 나는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계속 주변을 맴도는 흑인 꼬마 시릴로. 마치 넘봐서는 안될 공주님을 넘본 것처럼 아이들의 이야기는 부풀려져 있었고, 그녀는 그 소문을 믿기라도 했는지 정말 마리아가 된 듯 나에게 더 쌀쌀맞게 굴었다.
 
 결국, <점프점프 퀴즈>의 녹화일은 다가왔고, 최종 선발 멤버는 그 전 주 그녀의 생일에 초대받은 열 명의 아이들 중에 나왔다. 다들 준수한 외모에 말도 또박또박 잘 하는 친구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서울 일현 국민학교 5학년 6반 '키드캅'입니다!"

 녹화가 있는 날, 나는 반에서 스무 명 가는 응원단에도 끼지 못했다. 선생님이 같이 응원 가고 싶은 사람은 손 들라고 했지만, 건너 건너 전달받은 구깃구깃한 쪽지 때문에 손을 들 수 없었다.

 '너 손 들면 죽어. 응원단도 카메라에 잡힘.'

 TV에 나오는 영은이의 미소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진난만해 보였다. 사회자의 질문에 사회자와 카메라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며 그녀는 똘망똘망하게 이야기했다. 이번 2학기에는 전교 부회장 선거에 나갈 거라고, 장래 희망은 앞에 계신 한선규 아저씨처럼 멋진 아나운서가 될 거라고.

 '너 예쁘긴 참 예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나를 하대하는 것에 대해 명분을 확실히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그래 저렇게 예쁜 아이니까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지 하며, 열두 살의 나는 마음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브라운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아득히 멀어지면서 결국 그녀는 소실점 밖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5월 25일, 봄에 태어난 원생들의 생일잔치가 있습니다. 두 달 동안 갈고닦은 자녀들의 재롱잔치도 준비되었으니, 바쁘시겠지만 점심시간 짬을 내셔서 어린이집에 들러주세요. 간단한 다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개나리반 교사 송영은 올림"

 두 달만에 그녀에게 메일이 왔다. 평소에 야근이 많은 나 대신에 어머니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와주시는데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재민이 선생님 너랑 나이는 같다던데 꼭 20대라고 해도 믿겠더라. 늘씬하고 싹싹하고 꼭 아나운서 같어야."

 "그래요? 생일잔치 때 한 번 가서 인사드려야겠네."

 사실, 엄마 걔 나랑 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나 걔 때문에 마음고생 좀 했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어머, 안녕하세요. 이제야 처음 뵙네요. 재민이 아버님이시죠?"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않았는데, 첫인사 말과 미소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려서 조숙한 아이들은 커서도 그대로라더니, 정말 열두 살 때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 저 친절한 미소와 말투로 너는 <점프점프 퀴즈> 출연을 공약으로 내걸고 반장 선거에 출마했었지.
 
 그녀가 테이블에 있는 이름표 중에 내 것을 찾아 건넨다.

 '개나리반 안재민 아빠, 안성진'

 설마 내 이름을 보고도 기억 못 하는 걸까. 아니면 기억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일까. 전자라면 난 정말 너에게 먼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고, 후자라면 넌 정말 어릴 때와 다르지 않게 성장했구나.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할머님(웃음) 정말 오래 기다리셨죠? 지금부터 개나리반 원생들이 준비한 무대를 시작하겠습니다. It's show time!"

 24년 전과 다르지 않게 사람들 앞에 나서 진행하는 솜씨가 좋다. 아나운서가 된다더니, 그래도 그 끼는 여전하네, 너.

 맨 앞에 선 내 아이가 보인다. 어린 시절 나와 달리 쭈뼛쭈뼛 들러리 서지 않고 당당히 무대 앞줄에서 춤추는 모습이 대견하다. 착각인지 몰라도 무대 옆에서 아이들 동작을 가이드하는 영은이도 왠지 내 아들만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묘한 승리감도 마음속에 똬리를 튼다. 그래그래 장하다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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