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5] 가방
'생애를 통틀어 한 번 타보고 싶은 / 사보고 싶은 자동차'를 의미하는 '드림카'라는 말이 있다면, 비슷한 의미로 '드림백'이라는 말도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드림백'은 '샤넬 2.55 클래식 캐비어 라지 블랙금장'이다.
저 암호 같은 몇 글자가 현실 세계에서는 1천만원에 가까운 금전적인 가치를 지닌다. 저 세계에서는 '빈티지' 혹은 '세컨핸즈'라고 표현하는 '중고'가격도 상태에 따라 기백만원씩 한다. 그래서 아직 내게 '드림'으로 남은 거겠지.
소위 '명품가방'이라는 건 결혼하고 첫 해에 신랑으로부터 선물받았다. 프라다 사피아노 토트 겸 숄더백 미듐 사이즈, 버건디 컬러에 신상이어서 한 푼 에누리도 없이 백화점에서 정가 그대로 주고 샀다. 그 해 가을에는 멀버리 베이스워터 토트백을 하나 더 샀는데 스테디셀러인 브라운 컬러여서 30% 세일 대상품목도 아니어서 또 정가 그대로 주고 샀다. 둘 다 진짜 소가죽 소재라서 무겁기도 무겁고, 사피아노는 스크래치엔 강하지만 습기엔 약해서, 베이스워터는 스크래치와 습기에 모두 약해서 마음 편히 들고 다니지도 못한다. 사피아노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부슬비가 내리는 바람에 쟈켓으로 가방을 감싸고 돌아다닌, 유머게시판에서나 볼 법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나야 나.
물론 이제는 프라다고 멀버리고 가릴 것 없고, 에르메스고 펜디고 가방을 더 사고 싶은 욕망도 없다. (물론 돈도 없다) 봄가을엔 펭귄북스의 '위대한 개츠비' 표지를 딴 디자인의 에코백, 여름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태슬 호보백을 들고 다니는 게 제일 무난하고 편하다. 그래도 '샤넬 2.55 클래식 캐비어 라지 블랙금장' 정도는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아마 나조차도 깊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동경이나 소망 같은 것의 발현일텐데 이게 단순히 물욕이나 명예욕과 맞닿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샤넬백'을 떠올릴 때면 항상 같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아빠가 선물해준 샤넬 콜렉션'이라며, 모두 합쳐놓으면 우리 집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는 가격의 샤넬 2.55 클래식, 보이샤넬, 샤넬 서프, 샤넬 그랜드샤핑, 샤넬 도빌, 샤넬 볼링, 샤넬 클러치... 온갖 종류의 샤넬백이 크기와 색상별로 열과 오를 맞춰 늘어져 있던 인스타그램 속 사진. 내가 부러웠던 건 샤넬일까, 샤넬을 사주는 아빠의 재력일까, 금지옥엽 딸이라면 샤넬이든 뭐든 힘 닿는대로 다 사줄 수 있는 아빠의 애정일까.
내가 당장 내년에 인센티브를 타서(불가능) 내 손으로 '샤넬 2.55 클래식 캐비어 라지 블랙금장'을 산다고 해도(불가능) 그리 기쁠 것 같지는 않다(정말?). 내 '드림백'의 궁극적인 낭만은, 누군가 나를 위해 '가방 따위에' 1천만원 쯤은 가볍게 써주는 데 포인트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신랑이 그런다면 등짝을 때리면서 환불 하러 가겠지-_-)